습관
두 눈을 과장되게 질끈 감는 습관이 있었다. 나이가 아마 한 자릿수였던 시절이었다. 돌이켜 보면 아이들에게 흔히 있는 사소한 틱 같은 것이었다. 부모님은 꾸준히 지적했다.
'안 좋은 습관이야', '의식하고ᅠ노력하면 고칠 수 있어'
습관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알았다. 고쳐야 할 안 좋은 버릇, 그런 의미로.
조금 더 자라서, 눈병이 걸려 안과에 갔다. 의사 선생님은 이리저리 나를 진찰하더니 눈을 자주 비비거나 찡긋거리지 않느냐며, 만성적인 안구건조증이 있다고 했다. 그제야 어린 시절 눈을 질끈 감던 습관이 안구건조증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알았다. 함께 병원을 갔던 어머니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잔소리만 했다며 한참을 내게 미안해하셨다.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일까. 습관은 개인의 의지보다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고 믿는 편이다. 평생을 올빼미로 살아온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아침형 인간이 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한다고 해서, 다음 날부터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당장 의지가 충만한 그날 밤부터,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워 몇 시간이고 뒤척이다 스마트폰을 확인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래서 환경을 통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ᅠ원하는 습관을 만들어내거나, 더 이상 반복하고 싶지 않은 습관을 버리고 싶을 때 모두 마찬가지다. 그래서 청소년기의 내 컴퓨터는 잦은 포맷으로 하드디스크의 수명이 오래가지 않았다. 게임에 빠져들고, 지우기 위해 포맷을 하고, 또 빠져들고, 포맷을 하고… (모든 게임이 나쁜 습관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내게는 그랬다는 것일 뿐.)
십여 년ᅠ전, 금연을 할 때는 2달간 모든 사적 모임을 끊었다. 코로나도 없던 시대에 자체적인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한ᅠ셈인데, 금연의 가장 큰ᅠ적인 '친구'와 '술'이라는 환경을 동시에 차단하기ᅠ위해서였다. 거리 두기는ᅠ성공적이어서, 나는 이후의 삶을 담배 쩐내 없이 살 수 있게ᅠ되었다. 하지만 원하는 습관을 만들어내는 건 환경 만으로는 부족하다. 최근엔 매일 아침 기상과 동시에 20분간 홈트를 하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이틀 만에 포기하고 말았다. 머리부터 손 끝, 발 끝까지 가득한 멜로토닌과의 싸움을 이길 수 없었다.
어제도 인스타에는 ‘요즘 점심시간에 운동하는 재미로 회사에 출근한다’는 친구의 스토리가 올라왔다. 그래, 너는 지금 갓생을 살고 있구나. 더 열심히 자랑해 주렴. 내일 아침엔 나도 문득 의지를 불태워볼 수 있게.
큰일이라면 큰일일까. 결혼을 하고 나서야 내 이상형이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연애를 할 때도, 결혼을 하고 나서도, 아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게 있어 누군가 '나의 이상형을 만났어.'라고 이야기하는 건, '어제 버스 정류장에서 유니콘을 봤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기적과 같았다. 이상형이라는 건 상상 속의 동물과도 같다는 것. 어딘가 존재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번 생은 아닐 거라 생각하며 살았다.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
바로 이것. 얼마 전 우연한 기회로 깨닫게 된 나의 이상형이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습관이란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외출 후 돌아오면 손과 발을 깨끗이 씻는다.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할 때 의식적으로 바른 자세를 유지한다. 샤워를 할 때 미드를 틀어놓고 리스닝을 한다. 주차는 늘 꼼꼼하고 성실하게 라인에 꼭 맞게, 1자로 한다. 하루에 물을 2리터씩 마신다. 자기 전에 햄스트링 스트레칭을 한다. 매사에 진지하다. 하지만 말장난과 농담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놓치면 아쉬워한다. 아침저녁으로 반려견과 공원을 산책한다. 사용한 물건은 바로 제자리에 둔다. 눈이 마주치면 아무 이유 없어도 미소 짓는다.
좋은 습관으로 가득 찬 그 사람의 일상은 야물게 짠 물걸레로 방금 훔친 마루처럼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 듯 보였다. 확실히 그 사람은 작은 것들의 가치를 알아볼 줄 아는 사람이었으며, 그렇기에 사소한 것들의 소중함 역시 금세 알아채는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멋진 사실은 바로 그 사람과 함께 살면서 알게 된 것이다. 그 사람은 나의 구남친이자 현남편이다. 그의 하루를 채우고 있는 좋은 습관 덕에 나를 포함한 우리의 덧없는 일상이 더없이 빛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