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어릴 적에는 몸이 약했다. 편식이 심해서 비쩍 말랐고 소화기도 좋지 않아 자주 체하고 토했다. 배가 쿡쿡 쑤셔서 허리를 펴지도 못한 채 비틀거리며 어머니를 찾던 장면이 기억난다. 자다가 소리를 지르며 깨어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온몸에 땀이 흥건하고 오줌을 지리기도 했다. 눈이 약해서 봄마다 안과를 다녔다. 눈에 약을 넣고 주사를 맞고 약을 먹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그런 사소한 의료행위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던 때 즈음, 그러니까 나는 아마 열 살 정도였던 것 같다. 어머니는 대도시로 이사 온 뒤부터 절을 다니기 시작했다. 먼저 그 절을 다니던 이모와 함께였다. 원래 불교는 소원을 빌고 그 대가로 뭔가를 얻어내는 지복신앙과는 거리가 멀지만, 어머니에겐 '불심이 곧 나의 건강'이었다. 하필이면 나의 몸이 눈에 띄게 건강해지던 시점이 그 때여서, 어머니의 신앙심은 급격히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늘 그렇게 말했다. 당신이 그 절을 다니기 시작한 뒤로 내가 건강해졌다고. 지금은 돌아가신 그 스님이 정말 훌륭한 분이셔서, 그분이 내게 기운을 전해주어서 그렇게 된 거라고. 그럴 때마다 나는, 나의 건강과 어머니의 신앙은 우연히 시점이 겹쳤을 뿐이라며 구태여 논리적인 척을 하곤 했다.
나이가 들면서 아픔을 마주칠 때가 많다. 때로는 내 몸 안에서, 때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어딘가에서. 몇 년 전에는 아내의 어깨가 탈이 났다. 그 뒤엔 내 허리가 문제였고, 최근엔 다시 아내가 심각한 두통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허리 수술을 받으셨다. 지리산 자락에서 수도권까지 먼 길을 오셨다. 그땐 코로나 때문에 병문안도 가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을 마주치면 한없이 나약해진다.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절벽 앞에 밧줄 하나 없이 서 있는 기분이다. 나눠 가질 수도, 답을 찾아 줄 수도 없는 무기력함에 작아지고 또 작아진다.
아들의 힘겨움을 바라보던 어머니의 마음이 그랬을까. 그래서 그에게 믿음이 돋아났던 것일까. 나이가 들고 아픔을 마주할 일이 많아지면서 신앙의 존재를 생각하게 된다. 그것에 기댈 수밖에 없는, 고통 앞에 나약한 인간을 조금씩 알게 된다.
습관처럼 통화버튼을 누르고 말한다.
"엄마~ 뭐해요?"
거의 매일 엄마와 통화를 한다. 딱히 용건이 없어도 10분이고 20분이고 끊김 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어느 날 통화 말미에 엄마가 "요즘 머리가 너무 아프네. 두통약을 먹어도 낫지를 않아."라 하셨다. 여러 가지 걱정 덩어리가 떠올랐지만 "보통 머리 아픈 건 뇌나 머릿속의 문제보다는 근육통이나 치통 때문인 경우가 많더라고."라며 대수롭지 않은 일일 거라 말하고 끊었다. 다행히 그 말을 듣고 엄마는 곧장 치과를 다녀오셨다. 치아를 대대적으로 손봐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한번, 임플란트며 금니며 치료 금액에 두 번 놀라셨다. 두어 군데의 치과를 가서 상담을 받았으나 여의치 않았다. 결국 서울에 계신 친척 분이 운영하는 치과에서 치료를 받기로 했다. 엄마는 경기도에 살고 계셔서, 일주일에 한두 번씩 병원 여정을 위해 서울로 상경하시는 상황이 되었다.
다행히 치과 진료로 엄마의 두통은 차도를 보았다. 엄마에겐 별일 아니라 했지만 난 인터넷으로 60대 여성의 두통에 대해 열심히 찾아봤었다. 무서운 인체 사진과 날카로운 직선이 주는 불안한 그래프를 보며 나 역시 팔자에 없던 두통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 후 엄마는 성실히 병원을 다니셨다. 그것마저 자식으로선 감사한 일이었다. 다만 병원을 오가는 길이 고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치과 진료를 마치면 보통 이가 불편한 상태여서 집에 돌아가시는 길에 맛있는 밥 한번 사드리기 힘들었다.
치과 진료의 대장정이 마무리되는 날, 고생 많았던 엄마를 위해 맛있는 걸 사드렸다. 엄마는 어릴 때 나와 동생은 집 앞에 있는 치과를 보내면 엄마가 없어도 둘이 손잡고 가서 씩씩하게 치료를 받고 오던 아이들이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다 큰 어른이 어린애 만도 못하다는 말씀에 원래 어른이 되고 보니 무서운 게 더 많아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연년생 남동생의 손을 잡고 치과를 다니던 씩씩한 둘째 누나였던 난 이제 부모님이 병원을 가시는 게, 그들의 건강에 이상 신호가 오는 것이 가장 두려운 어른이 되었다. 집에 가시는 엄마에게 이제 절에 가시면 부처님께 우리들 말고 엄마와 아빠의 건강을 제일 먼저 부탁드리라 말했다.
"그렇네. 이젠 정말 그래야겠다."
대답하는 순간 웃던 엄마의 눈이 사뭇 진지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