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할머니, 내 이름에서 같이 살아요

필명

by 홍지이

나는 내 이름이 좋다. 이름 끝에 ‘빈’이란 글자가 들어가는데, 그로 인해 이름으로 별명을 지어 놀리던 어린 시절에는 누구보다 별명 부자였다. 빈대, 빈대떡, 빈 깡통, 빈 수레 등등 별 시답잖은 것들을 갖다 붙였는데,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릴 때 만난 대부분의 어른이 ‘이름이 예쁘구나.’라는 말을 아낌없이 해 주었기에. 새 학기 새 반에 가면 선생님께서 첫 출석을 부르다 멈칫하시는 이름 중 하나였다. 이름의 주인이 누군지 살피면 좋으면서 늘 있어서 온 일이라 아무렇지 않은 척, 예쁜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듯한 표정을 짓곤 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조금 달랐다. 더 이상 글자 하나 가지고 낄낄거리던 어린애들과 서로의 이름을 주고받는 세상이 아니었으므로. 이번엔 본의 아니게 이름만 알고 지낸 이들과의 첫 대면에서 반전의 주인공이 되곤 했다. 이름이 중성적이라 성별을 예측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덕도 많이 봤다. 이름으로 만든 에피소드는 첫 만남의 어색함을 잠재웠고, 이야기의 포문을 여는 역할을 쏠쏠히 했다. 자라고 보니 형제·자매의 이름과 돌림자가 있는 것도 날 때부터 새긴 유대감이란 생각에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더욱 각별해졌다. 시절에 따라 유행하던 이름이 아닌 데다 성도 흔하지 않아 동명이인을 만난 적이 아직 없다. 그로 인해 유치원에서도, 직장에서도, 병원에서도 이름을 부르면 언제나 오직 단 한 사람이 되었다.


누구보다 자신의 이름을 가장 사랑했지만, 첫 책을 출간하며 필명을 만들었다.


첫 마음은 작가로서의 흐릿한 자아를 또렷한 이름으로 바로 세우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그렇다고 본명으로 살아온 삶을 지우겠다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염원한 ‘쓰는 사람’이 되어 세상 앞에 설 생각을 하니, 글에 깃든 의지를 아로새긴 이름을 몸에 두르고 싶었다. 앞으로 내 글을 통해 나아갈 길이 어디인지, 어디에 닿을지 아직 모른다. 어쩌면 평생 알지 못할 그 모호함에 필적할 모종의 적확함을 품고 싶었다. 불현듯 부모님께서는 내 이름을 지으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떠올려봤다. 아마 그 이름으로 불리는 자의 모든 날과 모든 순간이 온당하고 가치 있기를, 평온과 안녕을 바라셨지 않았을까.


쓰는 사람이 된다면, 책을 낸 작가가 된다면 그때부터 내가 쓰는 대부분의 글에는 이름이 따를 것이다. 그러므로 이름 앞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글 안에서는 내려놓은 단어와 문장에 책임을 지고, 글 밖에서는 누군가의 삶과 사회의 한 부분에 기여해야 한다. 한없이 부족한 자에게 우주의 기운이 필요한 때이다. 가슴에 박혀 영원히 잊지 못하는 소중한 이름들을 소환했다. 강렬했던 삶의 흔적에 비해 어쩌면 자주 불리지 않은 그 이름들. 누군가의 이름을 앞세우느라, 혹은 별거 아닌 역할에 짓눌려, 이를테면 어머니와 며느리, 때론 딸. 기억 속에서 쉽게 지워지는지도 모를 그 이름을 한 자 한 자 모아 다시 불러냈다. 내 글 속에서 한 번 더 사실 수 있기를. 그들과 함께인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무적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나의 필명 홍지이는 할머니 두 분과 어머니의 이름에서 빌려온 이름이다.

나는 이분들의 이름을 이어받아 비로소 글 쓰는 사람이 되어 간다.

keyword
이전 10화작가가 되어 누구보다 유명해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