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해결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오래전부터 이미 문제의 원인을 알고 있었다.
돈을 아껴보려고 늘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숫자에 대한 관념 자체가 남들과는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아주 간단한 수 계산도 남몰래 계산기를 두드려야 했고, 기본적인 생활비 계산이 되지 않았다. 생활비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숫자들이 둥둥 떠 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돈은, 숫자는 항상 내게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했고 현실과 관련된 무언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숫자는 엄연한 현실이다. 우리 삶의 많은 것들이 숫자와 연관되어 있고, 내 통장 속의 숫자는 내가 살아가는 현실의 모습을 결정한다.
수학을 모르는 것, 특히 사칙연산을 하지 못하는 것은 나의 '밑 빠진 독'이었다. 수학을 모른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남아 있는 상황에서 아무리 가계부를 쓰고 절약하려는 노력을 한들 소용이 없었다. 먼저 깨진 독부터 교체해야 했다.
내가 오랫동안 껴안고 살아온, 한 해 연봉 만큼의 빚. 그 빚을 갚을 능력이 내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서점에 가는 것이었다. 동네에서 가장 큰 서점에 가서 초등수학 문제집들을 꼼꼼히 훑어봤다. 우선 내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했다.
문제집을 펼쳐 이런저런 문제들을 풀어보니, 덧셈은 자릿수가 크더라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뺄셈부터는 잘 되지 않았다. 구구단을 외우면 곱셈까지는 혼자서도 진도를 나갈 수 있을 듯했지만, 나눗셈부터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학습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릴 때 그토록 하기 싫어했던 수학 학습지를, 성인이 되어 내 돈으로 다시 하게 된 상황이 재미있었다.
학습지 양대산맥 중 하나인 K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유선 상담을 예약했다. 상담하고 싶은 내용을 적으라는 칸에 이렇게 적었다. 성인인데 기본적인 사칙연산을 하지 못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걸려왔다. 친절한 목소리의 상담사였다.
"안녕하세요, 윤은솔 님 맞으시죠?"
"네."
"성인인데 기본적인 사칙연산을 하지 못한다고 문의를 주셨어요.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이 어려우시다는 얘기 맞으시죠?"
상담사는 약간의 웃음을 띤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친절한 느낌을 주기 위한 웃음일 터였다. 그러나 그 웃음에는 왠지 내 마음속의 열등감을 건드리는 구석이 존재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웃지 말아주세요. 저는 진지해요. 성인인데 사칙연산을 못한다는 게 우습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제가 어렸을 때 사정이 있어서 학교를 못 다녔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수학을 못하게 된 거니까 웃지는 말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나 또한 친절한 어조로 말하긴 했지만 내용은 다분히 공격적이었다. 상담사는 당황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웃겨서 웃은 게 아니에요. 오랫동안 상담을 하다 보니 이런 말투가 습관이 돼서 그래요.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사실 상담사가 잘못한 건 없었다. 성인인데도 초등학교 수학조차 모른다는 사실이 스스로 너무 부끄러워서, 아무 의도 없는 상담사의 말이 기분 나쁘게 들린 거였다. '내가 지금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듣는 말마다 다 나를 공격하는 말처럼 느끼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곧바로 학습지를 시작했다. 한 주에 60장까지 받을 수 있다고 해서 그렇게 해 달라고 했다. 일주일에 하루는 쉰다고 가정하면 매일 10장씩 풀어야 하는 양인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공부에도 때가 있다'는 뻔한 말이 마음 깊이 와닿았다.
그러나 공부에 정말로 때가 있다면, 나에게는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뺄셈까지는 혼자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학습지는 곱셈부터 시작하려 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생각은 달랐다. 레벨 테스트를 간단하게 시켜 보고는 '덧셈부터 하셔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처음에는 선생님의 그런 결정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학습지를 풀다 보니 선생님의 판단이 옳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덧셈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뺄셈은 더욱 어려워했다. 곱셈부터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건 나의 오만이었다.
뺄셈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이 있었다. 내가 숫자를 거꾸로 세는 걸 어려워한다는 사실이었다. 뺄셈을 하기 위해 10, 9, 8, 7, 6을 마음속으로 세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숫자를 하나씩 빠뜨리곤 했다. 몇까지 셌는지 까먹어서 처음부터 다시 세야 하는 경우도 잦았다.
문제를 풀다가 막히면 유튜브에서 개념 강의를 찾아봤다. 뺄셈을 공부할 때 많은 도움을 받았던 채널이 있다. 아마도 현직 교사인 듯한 사람이 운영하는 채널이었다. 문제는 그 사람의 말투였다.
"자, 얘들아. 오늘은 받아내림에 대해 공부할 거야. 전혀 어렵지 않으니까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 선생님이 지금부터 천천히 설명해줄게."
아이들에게는 그런 친절한 말투가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괴감만 들 뿐이었다. 유튜브 수학 강의 속 선생님들의 상냥하고 다정한 말씨는 내가 지금 초등학교 수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결국 이건 수치심과의 싸움이었다. 나는 그 싸움에서 승리했다.
초등수학 유튜브를 보는 것, 구구단을 외우기 위해 어린이용 앱을 사용하는 것, 헷갈리지 않도록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가며 숫자를 거꾸로 세는 연습을 하는 것. 그 모든 것이 언제부턴가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집에서는 도무지 공부에 집중할 수 없어서 보통 카페에서 학습지를 풀곤 했는데, 처음에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무척 의식했다. 하지만 점점 신경이 쓰이지 않게 되었다. 카페에는 두껍고 어려워 보이는 교재를 가져와 온종일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그 사람들처럼 내가 해야 하는 공부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회피하는 게 부끄러운 것이지,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닐 터였다.
학습지를 풀 때는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을 낀 채로 푼다. 보통 낮에는 매미 소리, 밤에는 풀벌레 소리를 틀어두고 공부하는데 초등학교 여름방학 때로 돌아가 밀린 방학 숙제를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나의 여름방학은 지금이다. 이 방학이 끝나고 나면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수학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하니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너의 학습 공백이 일 년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일 년이 아니라고.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총 구 년간의 학습 공백이 있었던 거라고. 그걸 따라잡기 위해서는 당연히 긴 시간이 필요할 테니,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꾸준히만 하라고 했다.
내 항아리는 이제 밑이 깨져 있지 않다. 튼튼하게 새로 지은 항아리에 내가 담고 싶은 것들을 가득 담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