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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은솔 Sep 20. 2024

나는 허기가 아닌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음식을 먹었다

마음의 허기가 있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그 많은 돈을 도대체 다 어디다 썼어?"


나를 걱정하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이거였다. 한 해 연봉 만큼의 빚이 쌓일 때까지, 그 많은 돈을 도대체 다 어디다 썼느냐.


지금부터 일곱 번째 챕터까지는 내 '중독의 역사'에 관해 다룰 것이다. 나를 빚쟁이로 만든 최초의 중독은 음식 중독,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배달음식 중독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섭식장애를 앓았다. 폭식과 거식을 반복하며 저체중이었던 내 몸은 고도비만이 되었다. 언제부턴가 내가 단지 '먹기 위해' 음식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배가 고파서, 끼니를 챙기기 위해 밥을 먹어본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 되어버렸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재택근무를 했다. 재택근무를 하는 동안 생활 패턴은 엉망이 되었고, 식사 시간도 중구난방이 되었다. 오후 세 시에 아침을 먹기도 하고, 자정이 다 된 시각에 저녁을 먹기도 했다. 제대로 된 화구가 없는 원룸에 사느라 밥을 해 먹기도 힘들었던 나는 점차 배달음식을 시켜 먹는 일상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편안함은 빠르게 중독으로 변해 갔다.


언제부터였을까? 허기가 아니라 만성적 공허감을 느끼게 된 게.


허기는 밥을 먹으면 채워지지만 공허감은 밥을 먹는다고 해서 채워지지 않는다. 홀로 있어 심심하고 지루하고 외로운 시간들을 나는 오로지 먹으면서 보냈다. 업무나 집안일 등 반드시 해야 하는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를 제외한 시간의 빈 틈새를 음식으로 꾸역꾸역 메웠다.


예전에는 분명 그만큼 음식을 먹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음식을 먹지 않았다. 먹는 양이 아니라 먹는 방식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흔히 뚱뚱한 사람에게서 게으름의 흔적을 찾아내고 싶어 하듯, 사람들은 마른 사람에게서도 나름대로의 이유를 발견하고 싶어 한다. 아침을 안 먹는다고? 군것질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빵이나 떡을 잘 먹지 않는다고? 그러니까 그렇게 말랐지. 하지만 이런 식의 논리가 언제나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먹는 건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손목을 한 손 엄지와 검지만으로 그러쥐어 잡을 수 있었을 때에도 음식은 가리지 않고 많이 먹었다. 먹는 양과는 상관없이 마른 체형이었던 시절이 있었고, 그 시기는 꽤 길었다. 그러나 그때는 배고플 때만 음식을 먹었다. 점심은 열두 시, 저녁은 다섯 시 반. 그 이외의 시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일부러 그러려고 노력했다기보다는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배고프지 않은데 음식을 먹는다는 건 당시의 나에게는 무척 이상한 일이었다.


성인이 되니 시간이 많아졌다. 특정 부분에서는 이전보다 시간에 쫓기게 되었지만, 전체적으로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의 폭이 넓어졌다. 특히 재택근무를 하게 된 이후부터는 정말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자 나는 당혹감에 휩싸였다.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빈 시간을 음식으로 채워나갔고, 혼자 살게 된 뒤로는 말 그대로 음식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먹는다기보다는 '집어넣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행위였다. 식사 때를 정해놓지도 않고 마음이 내키면 아무 때나 먹었다. 하루에 여섯 번도 넘게 식사를 할 때도 있었다. 물론 직접 요리해 먹는 경우는 거의 없이 대부분 배달음식을 시켜 먹었다. 혼자서는 못 먹을 양의 배달음식을 잔뜩 시켜놓고 배가 부르다 못해 아플 때까지 입안에 욱여넣었다. 폭식으로 땡땡하게 부어오른 배를 붙잡고 스스로를 경멸하며 잠든 뒤에는, 다시 배달음식을 시켜서 배가 아플 때까지 먹었다.


혼자 있는 방 안에서는 언제나 자극적인 음식 냄새가 진동을 했다. 추하다고 손가락질할 사람도, 왜 그러냐고 걱정할 사람도 없으니 마음껏 음식을 먹고 또 먹었다. 그러는 동안 착실하게 불어난 몸은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마주할 용기를 잃게 했다. 예전에 입던 옷들은 죄다 작아졌고, 더는 맞는 옷을 찾기도 어렵고, 살이 너무 쪄서 걷기만 해도 숨이 차니 점점 더 밖에 나가고 싶지 않게 되었다. 결국 집에 틀어박혀 먹는 것에만 집중하는 삶이 완성되었다. 먹고, 먹고, 또 먹었다.


일을 할 때는 차라리 괜찮았지만, 그 날분의 업무를 끝낸 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혼자 보내는 시간은 너무나도 괴로웠다. 업무에 치이는 동안 잠시 미뤄두었던 일상의 걱정들이 걷잡을 수 없는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매일 저녁 여섯 시경이면 어김없이 나를 덮치던 불안과 두려움, '속이 허하다'고 느껴지는 공허감. 배가 고프다기보다 속이 뻥 뚫린 듯한 기분을 견디지 못해 항상 배달음식을 주문했다. 뭘 좀 먹으면 해결될 것 같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식으로 뱃속을 채우면 마음속의 빈 공간도 채워질 듯했다.


언제나 채워지기만을 갈망하는 이 욕구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무언가를 소비하는 행위에 중독되어 있었다. 배달음식 중독은 섭식장애의 증상이기도 했지만, 결제 버튼을 누르며 잔잔한 기쁨을 얻는 일종의 소비 중독이기도 했다. 배달음식을 시켜 먹는 행위는 짜릿하다. 누워서 메뉴를 보며 몇 개의 음식을 담고 결제를 마치면 아무런 노동 없이 몇십 분 만에 따끈따끈한 음식이 문 앞에 도착한다.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살아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내가 먹을 밥을 스스로 짓는 노동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잊은 채로 살아왔다. 내가 직접 불 앞에 서 있지 않고도 언제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 한 끼를 만들어내는 수고를 손쉽게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은 내게 은은한 쾌감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배달음식은 비싸다. 최소 주문 금액은 보통 13000원 이상이고, 이것저것 추가하다 보면 한 끼에 2만 원은 우습게 지출하게 된다. 하루 세 끼를 모두 배달음식으로 해결했던 나는 최소 금액으로 계산하더라도 매일 밥값으로 39000원씩 지불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매번 2~3인분 이상의 음식을 주문해 먹었음을 생각해보면, 날마다 6만 원쯤은 밥값으로 쓰고 있었을 것이다. 한 달이면 180만 원이다.


참고로 당시 내 월급이 세후 180만 원이었다. 생활하며 지출해야 하는 돈이 식비만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살아서야 매달 적자일 수밖에 없었다. 현금도 있는 대로 다 써버리고 신용카드도 한도를 꽉 채워 쓰곤 하던 나는 어느 순간 새로운 덫에 걸려들었다. '소액결제'라는 이름의 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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