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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에스더 Jun 18. 2022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 아이에게 격하게 화를 냈다

타인이 나를 인정하는 게 중요했던 이유



“오늘 즐거웠지? 엄마한테 뭐라고 말해야 하지?”


 “엄마 고맙습니다~~!!!” (둘째 아이)



 나 홀로 두 아이를 데리고 집 가까운 놀이공원에 갔다. 아이들은 폐장 시간이 될 때까지 신나게 놀았다. 차를 태우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아이들에게 물어봤다. 둘째 아이는 바로 웃으며 아주 큰 목소리로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런데 첫째 아이는 달랐다. 



“제가 왜 고마워해야 해요?” (첫째 아이)     



 자기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이었다. 나는 바로 깊은 빡침과 함께 애한테 불같이 화를 냈다. 



 “너가 무엇을 고마워해야 하는지 모른다고? 니가 가고 싶어 해서 간 거잖아. 엄마가 너를 거기에 데려갔다는 것부터 너는 감사해야 하는 거야. 너희들이 재밌게 놀았잖아.”




나는 너가 이런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 화가 나!!!!


 집에 오는 동안에 모진 말을 퍼부었다. 나는 너무 화가 났다. 신나게 놀았던 기억은 엄마가 화를 내는 걸로 강력하게 마무리. 아이는 잔뜩 주눅이 들었다. 



 사실 애는 크게 생각하지 않고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다. 오히려 엄마가 격하게 화를 냈으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었을 것이다. 결국 모기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죄송해요. 데려가 주셔서 고맙습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듣자고 한 게 아니었다. 그저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거였는데. 아이가 잘 놀았으면 된 거 아닌가. 즐거웠고 재밌었다는데. 이미 놀이공원에 간 목적은 이룬 거였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기어이 내가 애쓴 것을 상대방에게 인정받아야 했다. 어찌 보면 어린 두 아이에게까지 과하게 말이다.      










“당신이 지적받는 것을 싫어하니까 다른 말을 못 하겠어.”



 내가 무엇으로 화가 났는지 말하고 있었다. 다 듣더니 남편이 말했다. 맞다. 나는 타인에게 지적받을 때 힘들다. 내가 부족하다는 말, 잘못했다는 말은 유독 나에게는 상처가 된다. 가볍게 받아넘기기 어렵다. 




‘아, 이건 내가 부족한 거구나. 다음에는 이렇게 고쳐야겠어.’



 상대방의 말을 쿨하게 받아들이고 내가 더 나은 방향을 생각하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다. 내가 뭔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거기서부터 이성이 움직이지 않는다. 자꾸 걱정, 불안이 올라온다. 결국에는 우울한 마음까지 더해진다. 



 단순했던 말 한마디는 내 마음에 거대한 파도가 일으킨다. 자꾸만 와서 나를 친다. 그 말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지는 게 아니고, 돌에 새겨지듯이 선명하게 남는다. 지우려고 해도 안 된다. 계속 따라다닌다.







나는 지적받으면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까?




 나에게는 지적받았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란 의미다. 그건 사랑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랑받지 못한다는 건 언젠가 버림받을 수 있다로 확장된다. 



 나는 누군가에게 버림받는다는 게 두렵다. 어떤 그룹에서 소외되고, 내 존재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기분은 비참하다. 그러다 보니 과하게 노력한다. 상대방에게 칭찬받고 싶어서. 잘 보이고 싶어서. 힘이 들어간다. 하지만 마음은 하나도 편안하지 않다. 굉장히 피곤하다. 




 그래서 나와 가까운 사람이 내가 애씀을 알아주지 않을 때, 오히려 내 행동을 지적했을 때 더 쉽게 폭발한다. 그 대상은 남편과 두 아이다. 나에게 고마워하지 않는 태도와 말은 참지 못하겠다. 지나고 보면 내가 그 정도로 화낼 일은 아닌 거 같은데 싶어도 막상 그 상황에서는 생각대로 안 된다. 



 엄마가 되고 보니 나는 굉장히 열심히 하고 있는데,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남편조차 날마다 나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일까. 눈치 빠른 둘째는 늘 나에게 웃으며 자주 말한다. 



“엄마 고맙습니다.”



그 아이는 엄마가 무슨 말을 해야 기뻐하는지 안다. 5살이어도 엄마의 기분을 금방 파악한다. 






내향적인 사람은 보통 친근한 사람과 시간을 보내길 좋아한다.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거나 책상 앞에 앉아 따뜻한 음료를 마시며 책을 읽는 것을 선호한다. 내향적인 사람도 사교적이다. 다만 방식이 다를 뿐이다.


 <휘게 라이프, 편안하게 함께 따뜻하게>에 나온 글이다. 아이를 키우며 알게 되었다. 나는 사실 내향형의 사람이었다. 그동안 외향형 인줄 알고 밖으로 나를 내몰았다. 하지만 책을 읽고 필사를 하면서 발견했다. 내 생각, 내 마음을 온전히 끌어안아줄 때 가장 편안하다. 홀로 있으면서 나를 있는 그대로 알아봐 주는 것이다. 그렇게 채운 에너지로 다른 사람과 관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걸 모르고 밖에서 인정받고 사랑받으며 에너지를 채우려 했으니 힘든 거였다. 사랑보다는 두려움이 나를 덮치도록 준 셈이었다.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일에 관한 믿음이다. 이를테면 죽음이라는 사건은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은 두렵다’라고 죽음에 관해 우리가 가지는 믿음, 그것만이 두려움의 정체다.



 에픽테토스의 <인생수업>에서 다루는 ‘두려움’에 대한 글이다. 내가 인정받고 싶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동안 버림받고 홀로 남겨지는 것을 크게 두려워했다. 이것은 내 잘못된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그 결과 다른 사람에게 과한 인정과 칭찬을 바랐다.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힘들어했다.



 두렵다는 마음으로 외부에 통제권을 모조리 넘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타인에게 휘둘리고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내 존재를 잃어버리도록 만들었다. 나만의 빛이 사라지게 했다. 잘못된 패턴을 바로잡기 위해서 내 삶의 의미를 외부의 평가에 맡기려는 것을 줄여야 했다. 




 나란 존재는 이미 사랑이다. 내 안에 충분한 사랑을 가지고 태어났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누구도 나를 버릴 수 없다.



 이제는 불편한 타인의 무리 속에 있기보다는 홀로 깨어있는 시간을 즐긴다. 이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면서 나에게 베스트 프렌드가 되어준다. 버림받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 때문에 애쓰면서 무리에 가지 않는다. 



 대신 내 내면을 더 단단히 해주는 것, 내 안에 사랑을 깨우는 것에 마음을 쓴다. 그렇게 나는 오늘 나를 더 사랑하는 시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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