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무개 Oct 17. 2023

원 데이? 투 데이...


원형의 컨베어 벨트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돌고 있다. 카트 위에 짐들을 올려놓는 반가운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했다. 인천공항에서 출국 수속 때 만났던 여자가 맞은편에 있다. 긴장한 모습이었다. 여자에게 내쪽으로 오라며 손짓을 했다. 여자는 하루 먼저 도착한 사람이 마중을 나올 것이라고 했다. 화물이 줄어들고 있었다. 사람들도 화물과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빠져나간 화물들의 자리를 조바심이 채워 갔다.


기다린다는 것.

결과가 자신의 요구와 같을 거라는 확신 속에 머무는 것. 확신은 기다림을 묶는다. 가능성의 정도에 따라 불안과 기대는 반비례하는데, 가능성이 커지면 확신이 근육을 키운다. 몸을 키운 확신은 불안을 때려눕힌다. 어린 기대가 쑥쑥 자란다. 반대로 확신이 줄어들면 불안이 기대를 잡아먹는다. 내 기대가 잡아 먹히기 시작했다. 


여자의 눈이 커지는가 싶더니 얼굴이 밝게 변하며 노란색 덮개로 씌워진 배낭을 집어 들었다. 배낭을 살피고 바코드 스티커를 떼어 손안에 넣고 구겨버렸다. "어? 이거 내 꺼 아닌데..." 덮개를 반쯤 벗기다 말고 여자의 몸이 굳는다. 여자는 재빠르게 그러나 허겁지겁 배낭 덮개를 다시 씌우고 구겨진 스티커를 대충 붙인다. 우발적 범죄의 흔적을 지운다. 하지만 단서는 곳곳에 있으며 목격자도 있다. 배낭이 화물 컨베어벨트 위에 던져졌다. 나중에 찾은 여자의 배낭도 같은 크기의 노란색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입국장을 벗어나 밖으로 나왔다. 기대하던 장면은 연출되지 않았다. 우르르 달려드는 택시와 오토릭샤 운전수들이 보이지 않았다. 왠지 공식 환영인사를 생략한 것 같아 서운했다. 지하철이 생기기 전에는 여행 중 겪게 될 모든 경험이 발을 내딛는 순간 예고편처럼 펼쳐졌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지하철을 이용해 뉴델리 역으로 향했다. 택시와 오토릭샤들의 수입이 많이 줄었을 거라는 쓰잘데 없는 걱정과 함께...


숙소를 구하기 위해 빠하르 간즈 골목을 서성였다. 시간은 이미 한 밤중이었다. 익숙한 얼굴의 여자 둘을 만났다. 비행기의 내 옆자리에 앉았던 교사였다. 그들의 종아리에는 라면 상자를 비롯한 짐들이 바짝 붙어 있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 겸 식당에 전해 줄 물건들이다. 이렇게 해 주면 보통 하루나 이틀 정도 숙식을 제공한다고 들었다. 제트배송...


덥다. 쉬고 싶다. 빨리. 여러 곳을 돌아볼 생각은 없다. '굿 데이...'어쩌구 하는 숙소에 들어갔다. 냉방기가 있으면 800루피, 없으면 400루피. 물가가 올랐다. 여기라고 다를 리 없다. 당연히 냉방기는 필요했다. 하지만 더 당연히 필요한 건 낮은 가격이다. 냉방기 없는 방을 350루피로 하자고 했다. 뜨리 헌드레드를 말하고 피쁘띠의 에프 발음을 원어민 수준으로 하기 위해 윗니로 아래 입술의 4/5를 살며시 깨물었다. 그리고 그 멋진 에프 발음을 내뱉기 직전, 호흡이 윗니와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며 떼어내려는 순간. "피니시!" 직원이 말했다. 그의 윗입술과 아래 입술을 날카롭게 찢고 나오는 'P'가 나의 'F'를 두 동강 내버렸다. 아~ 나의 아름다운 에프... 나는 무참히 잘려나간 나의 에프를 끌어안고 모욕감에 분노를 느꼈다. 현지직원은 단호하게 손을 저어가면서... 아니, 벌레를 쫓아 버리듯 손등을 털며 '피니시 피니시!'하고 다시 말했다. 싸가지를 모두 제거한 상태였다. 빈정이 상했지만 금방 제 자리를 찾았다. 지금이 한 밤중만 아니면 확 삐져서 미련 없이 다른 숙소를 찾아다녔겠지만... 나는 지금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나는 알았다는 표정을 짓고, 내가 바라던 것을 얻은 것처럼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왔다. 마치 나의 요청이 굴욕적으로 거부당할 것을 바랐던 사람인 양. 


바로 옆 숙소에 들렀다. 가격을 물었더니 더 비싸다. 다시 굿 데이 어쩌구로 돌아가야 했다. 좀 더 유연한 자세로 마음을 말캉하게 만들었다. 자존심은 없다. 직원에게 400루피짜리 방을 사용하겠다고 했다. 당신의 신뢰성과 합리적인 가격을 믿는다는 표정이 최대한 나타날 수 있도록 하면서. "원 데이?" 직원이 묻는다. 나는 그 말속에 묘한 기운을 감지했다. 알 수 없는 흉기가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일정을 미리 계획하고 여행하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답하기가 어려웠다. "아이 돈 노" 내가 말했다." "투 데이?" 그가 다시 물었다. 나는 다시 "아이 돈 노"라고 했다. 그와 동시에 그가 반복해 묻는 말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어두운 의미를 보았다. 그가 반복해 묻는다. "원데이? 투데이?" '너의 투데이(two day)는 모르겠고 나의 투데이(today)는 확실하다니까' 나는 오늘 하루 그 이상 일지도 모른다는 냄새를 가득 채워 의문이 가득한 그의 호흡기에 내 대답을 불어넣는다. "아이 돈 노" 일단 오늘 지내고 봐서...


여권을 건넸다. 복사를 했다. 이어서 500루피 지폐를 지불했다. 숙박일지를 적는다. 그는 돈을 서랍에 넣는다. 열쇠를 돌려 잠근다. 그랬다. 그냥 잠가버렸다. 거스름돈 100루피... 숙박 일지를 다 적고 기다렸다. 그의 얼굴을 계속 쳐다보며 기다렸다. 야릇한 어색함이 나와 그 사이에서 솟아났다. "파이브 헌드레드!" 그가 말했다. 나는 들었다. '파이브'를... 포가 아니라 분명 파이브. 하루는 파이브란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리고 "노!"라고 말했다. 아주 단호하게 말이다. 


우선 약간의 지면을 할당해서-더 정확히는 화면을 할당해서- 이해를 돕고자 추가적인 설명을 해야겠다. 이곳에는 네 명의 사람이 있었다. 지금도 있다. 숙소를 구하는 여행자인 나와 내가 처음 방값을 물었던 이십대로 보이는 어린 사람과 삼십대로 보이는 덜 어린 사람, 그리고 오십대로 보이는 아주 덜 어린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아주 덜 어린 사람이 파이브 헌드레드라고 말한 것이다. 처음에 어린 사람과 덜 어린 사람은 모두 파이브가 아니라 '포'라고 말했다. 그런데 아주 덜 어린 사람이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다. 어린 사람과 덜 어린 사람이 멀쩡하게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데도 말이다.


확실한 어조의 '놉'에 가까운 '노'의 진동이 사라지기 바로 전 아주 덜 어린 사람이 내게 "노?" 하며 되묻는다.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직감이 스쳤다. 나는 어린 사람과 덜 어린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고 아주 덜 어린 사람에게 굳은 신념에 찬 눈빛과 목소리로 다시 "노!"라고 말한다. 아주 덜 어린 사람은 어린 사람과 덜 어린 사람에게 뭐라 말한다. 서로 몇 마디 주고받은 후 열쇠로 서랍을 연다. '계약해지...' 이런 된장! 이놈의 아주 덜 어린 사람이 500루피 지폐를 탁자 위에 냉정하게 던지며 가라고 할 것이다. 다시 밤거리를 헤매며 숙소를 찾아야 하나? 좀 비굴해 보여도 히죽 웃으며 그냥 조크라고 말할까. 


역시 예상대로 지폐 한 장을 꺼내는 아주 덜 어린 사람. 테이블 위에 놓는다. '아... 쓰파~' 낙담과 삐침이 밀려오는 순간. 숫자 100! 분명 100이라는 숫자였다. 거스름 돈 100루피였다. 그 순간 내 얼굴은 관음보살의 자비와 함께 부드러운 미소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리고 감미롭고 여유로우며 안정감 있는 낮은 저음의 톤을 이용해 한마디 한다. "땡큐~" 나는 어떠한 상황이라도 이성을 잃지 않고 담담하게 바라보는 사람인 척 보이고 싶었다. 


방은 덥다. 침대에 잠시 앉았다. 천장에서는 헬기 소리를 내고 있는 팬이 돌고 있다. 한숨 돌리고 담배를 사러 나갔다. 두 번째로 들렸던 게스트 하우스에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이 흥정을 하고 있었다. 역시나 오지랖 발동. 참견과 조언과 도움과 방해를 다 해냈다. 그들이 내일 마날리로 함께 가자고 한다. 며칠 머무르며 몸 상태를 점검하려 했지만 마음을 바꿨다. 마날리는 여기보다 시원하니까. 그들이 꼭 여자라서 일정을 변경한 것은 아니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물론 남자 보다야 여행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말보로 라이트 90루피. 닭꼬치 70루피. 생수 10루피...


샤워를 마치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깊게 빨아 들이마셨다. 연기를 내뿜으며 맛을 천천히 음미...? 오!!~ 이런 개떡 같은 짝퉁 같으니라구... 평화로운 기분을 몽땅 날려버렸다. 아쉬움에 세 모금 빨고 나니 필터에 불이 붙었다. 아. 거지 같네. 어떤 식물의 잎이길래 이런 맛이 날까? 팬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럽다. 저걸 밤새 틀고 자면 분명 아침에 감기에 걸릴지 모른다. 고민 끝에 팬을 껐다... 그리고... 더... 웁... 다... 다시 일어나 스위치를 켰다. 돌고 돌고 돈다. 나도 돌 지경이다. 말보로 라이트... 거지 같다... 굿나잇...


다음날 나는 감기에 걸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취향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