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배우가 유명 시상식에서 조연상을 받은 뒤,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향해 남긴 말이 회자되곤 합니다.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죽음이란 게 단순히
존재양식의 변화인 거잖아
젊은 친구가, 어찌 그런 생각을(알고 보니 동갑)..
죽음을 생각합니다. 늘 어딘가에, 나도 모르는 그 시점에 도사리고 있을 그것에 대해 떠올리는데,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할아버지란 사람도 60대에 돌아가셨고, 우리 아버지 역시 칠순의 하늘을 보지 못할 듯하니, 나 역시도 남은 생이 대략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 정도.. 이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물려준 이 어둡고 짙은 마음을 되돌릴 길이 없습니다. 때로는, 나도 아무 생각 없이 밝고 명랑해지고 싶기도 합니다.
존재 양식의 변화.
그 배우는 창 밖의 꽃이 돌아가신 할머니라 하였지만, 전 그런 류의 환생은 믿지 않습니다. 대신, 마음만은 함께 한다는, 또 다른 믿음으로 앞으로의 시간을 살아가게 되겠지요.
아버지에게 섬망이 왔다는 문자를 엄마한테 받았습니다. 누군가에겐 낯선 그 단어가, 나는 익히 배워왔던 것이라 잘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 아버지에게 그런 모습이 나타나는 건 어쩐지 알 수 없는 느낌입니다. 내가 제대로 아는 것이 있기나 한가 싶어 집니다. 모두의 죽음이 같을 순 없고, 누구나 죽음을 예상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내 아버지의 마지막이 이토록 고생스러우리라 생각은 해보지 못했습니다. 끝이 고통스럽지 않게 빌던 내 기도가 무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삶의 시작과 끝은 내 손에 달린 것은 아니기에 이 시간을 원망하거나 불평할 수는 없겠지요.
죽음에 대해 생각합니다. 죽음이 내게 이토록 가까웠던 적도, 이토록 현실이었던 적도 없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그 죽음은 어떤 면에선 그렇게도 막연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안개 같은 것이어서, 나는 죽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180의 훤칠한 키. 장동건을 닮은 이목구비. 흔들리지 않는 직업 정신. 누구보다 명확한 삶의 기준과 가치관. 어느 부분에선 불완전하고 미숙했을지라도, 또 어떤 부분에서는 내가 사랑했고 자랑스러워했던 그 아버지는 나만의 허상이었을까요. 이미 변해가는 아버지의 존재 형태를 일단 마주하고 인정하는 것이 나에게는 아직 고통이기도 합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섬망, 그다음엔 무엇일까요. 죽음에 이르는 길이 이토록 길고 고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정신이 비교적 또렷했을 때, 당신이 모진 사람이었어서 마지막도 이렇게 모진 것인지, 엄마에게 말했다 들었습니다. 아마도… 하면서 나 또한 말끝을 흐렸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고. 악인도 아니었던 지난 삶을 굳이 이런 식으로 보답받아야 할까요. 삶의 끝은 지나온 발걸음과 아무런 상관없는 게 맞는 것이라 믿어야겠지요.
죽음에 대해 생각합니다. 당신의 죽음에 대해, 그 죽음 앞에서 무력한 나에 대해 떠올립니다. 그 어떤 것도 내게는 선명하지 않습니다. 부디 그 끝에 후회와 슬픔만이 가득하지 않기를 바라고 바랄 뿐입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손 잡았던 게 언제였던가, 그 온기를 잊지 않으려 가슴을 보듬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