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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천수 Sep 30. 2020

그때는 사랑이었고, 지금은 추억이지만

나의 사랑, 나의 그리움




글쓰기를 하면서 생각이 머릿속에서 멈춰버릴 때면 가끔 책장 앞에 선다. 나란히 꽂혀있는 책의 제목을 눈으로 읽어본다. 오래된 책부터 최근에 사서 꼽아놓은 책까지 한 바퀴를 돌다가 마음이 이끄는 책을 뽑아 책장을 넘겨본다. 책갈피가 끼워져 있거나 페이지 모서리를 접어 둔 게 발견되면 손을 멈추고 문장에 시선을 두게 된다. 접어놓은 페이지를 읽다 보면 그때와 같은 감동이 기억을 안고 밀려올 때가 있다. 그러나 어떤 책은 책 페이지에는 분명히 노란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 놓았는데 읽었던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마치 처음 보는 듯한 생소한 느낌으로 당황할 때가 있다. 틀림없이 페이지의 문장에 밑줄을 그을 때는 무슨 감동이 밀려와서 그어 놓았을 터인데도 지금 읽어보면 전혀 공감이 가지 않는 문장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삶도 책 속의 밑줄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해갈 것이다. 그때의 나의 삶과 지금의 삶이 다른 것처럼. 지나간 것은 조금씩 잊혀가고 새로운 것들이 내 삶을 채워나가듯이.          

         



오래되었지만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던 기억이 나는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미국 작가인 잭 캔필드와 마크 빅터 한센이 공동 편집한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다. 모두 3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당시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장기간 올라있던 책으로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며 인생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모아 엮은 책이었다.



이 책은 어느 페이지를 열고 읽어도 좋을 뿐 아니라 이야기마다 다른 느낌의 잔잔한 감동을 전해준다. 책을 펼치다가 책 한편에 끼워져 있는 반쯤 접은 긴 메모지 한 장을 발견했다. 무엇일까? 궁금증을 달래며 천천히 펼쳐 든 순간 어디서 본 것만 같은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것은 아내의 50회 생일을 맞아 축하한다며 보낸 나의 편지였다. 흔히 50세면 지천명(知天命)이라 하지 않는가.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말인데, 쉽게 해석하면 '친구나 이웃에게 존경받으며 행복한 일상을 꾸려가는 나이'라고 미화해 본다. 이게 왜 이 책 속에 끼워져 있었지? 생각이 났다. 아내도 이 책을 너무 좋아해서 시간이 나는 대로 침대에 누워서 읽던 기억이 새록새록 올라왔다. 아마도 그때 편지를 직접 전해주는 것이 민망스러워서 아내가 평소 애독하던 책 속에 끼워 둔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그때를 회상하며 아련한 마음으로 편지를 읽어 냐려갔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먼 산자락에 진홍 빛으로 익어 가는 단풍이 계절의 신비함을 전해 줍니다. 이곳은 아직 가을 햇살 뒤에 숨은 나뭇잎이 화려한 빛깔을 숨기고 있지만, 당신이 다녀온 오대산은 형형색색의 단풍이 구비구비 계곡을 타고 수려한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니 나보다 먼저 가을 속 향연을 만끽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가을에는 참으로 생각나는 것들이 많아지네요. 지나간 시간 속에 감춰진 아름다운 추억도 하나씩 꺼내 보고 싶고, 함께 어디론가 2박 3일쯤 여행도 떠나고 싶고, 단풍잎이 줄줄이 늘어진 어느 호젓한 맛집에서 오손 도손 맛있는 음식도 먹고 싶습니다. 어쩌면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나이가 들었다는 이야기로 바꿔도 될까요?

당신과 함께 겪었던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유명 산 답사라며 찾아 나선 등산이며, 어렵게 시간을 내어 다녀온 유럽의 진귀한 풍광들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나라마다 다른 문화와 특색 있는 유적들이 품고 있는 고귀한 향기를 잊지 못합니다. 집 떠나면 잠 못 드는 당신의 불면증을 이유로  당일치기로 다녀온 짧은 여행의 행복했던 단편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군요. 당신과 함께 만든 모든 것은 우리 삶에 지워지지 않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오래도록 가슴에 따뜻한 온기를 전해 줄 것입니다. 모든 것은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이며, 함께 걸어가는 인생의 여정에서 만난 아름다운 행운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당신의 50회 생일이군요. 우리가 만난 세월이 벌써 24년이나 되었나요?  한창 꿈을 펼칠 나이에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키우면서 옴짝달싹 못하던 시절,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 앞에서 절망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사회적으로 무언가 이루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직장을 그만두고 실업자로 전락하여 당신만 바라보던 그 시절을 되돌아봅니다. 참으로 많은 시간이 우리 곁을 지나갔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한결같은 모습으로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당신이 보고 있어도 또 그립습니다. 날마다 곁에 있는 당신이지만 언제나 열심히 사는 그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가방을 챙겨 현관문을 나서는 당신의 모습이 언제나 멋져 보이는 것은 내 마음 온전히 당신을 향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날마다 바쁜 하루를 보내며, 생기발랄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당신이 내겐 행복입니다. 아름다운 인연으로 만나, 함께 사는 동안 많은 것을 해 주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당신 곁에 서 있는 내 모습도 괜찮아 보이지 않나요?

미안하다는 말이나 사랑한다는 말이야 언제나 할 수 있지만, 사랑하는 마음 만은 보이지 않는 가슴속에 피어난 신비로운 꽃처럼 당신과 나 사이에서 행복한 향기를 피우고 있잖아요. 당신이 건강하고 내가 건강한 것이 지금은 행복이며, 다가오는 시간 속에서 당신과 나의 이야기를 엮어 갈 삶의 힘이 아닐까요?

가을이 깊어갑니다. 깊어가는 가을이 나뭇잎에 다 안기기 전에 내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당신 향한 내 사랑을 함께 전하고 싶습니다. 오늘, 사랑하는 당신의 50회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동봉한 나의 작은 선물이 앞으로도 우리의 아름다운 인생, 행복한 삶을 위한 따뜻한 약속으로 남아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20**. 10. **. 당신의 허즈.    



편지를 읽으면서 뭉클해져 오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함께한 시간과 기억 속에 저장해 둔 사건들이 많을수록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시간의 폭이 넓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나의 외로움은 지난날의 아름다웠던 추억 곁에 서면서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비워진 마음의 공간을 글쓰기로 채워가며 그때는 몰랐던 이야기를 풀어내고 흩어진 조각들을 맞춰가는 나만의 시간이 즐거울 뿐이다. 나의 추억 속에 나의 기억 속에 조용히 숨어있는 소중한 순간들을 만나러 오늘도 삶의 여정에 마음 한편을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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