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에는 500권이 넘는 책들로 넘쳐흐른다. 취미 중 하나가 책을 읽는 것이기도 하지만 구매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벽면의 한쪽에만 위치했던 책장은 어느새 모든 벽면을 채웠다. 한쪽에 위치한 책장의 책들이 넘쳐흘러 바닥에 널부러진 상태에 있으면, 옷장을 치우고 책장으로 대체했고 그것 역시 넘쳐 흐르면 화장대를 치우고 책장으로 채운 것이 지금의 구조이다. 모든 벽면을 책장으로 가득 채웠지만 여전히 사들이는 책들로 내 방은 발 디딜 틈이 없다. 요즈음은 바쁜 일정으로 책을 읽을 시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책의 무게 때문에 전자책을 선호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책을 구매하는데 망설임이 없다.
‘나는 누구보다 책을 사랑한다. 책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고 자극을 받았으며 마음의 양식을 얻었다’ 라고 표현하면 매우 상투적으로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이미 고백했지만 현재 내가 앞만 보고 달릴 수 있는 이유는 그동안 축적해 두었던 내면의 양식을 하나씩 빼먹고 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제 더 이상 갉아먹을 마음의 양식 따위는 남아있는 것 같지 않지만..
책을 너무 사랑해서 하루에 한권을 읽어 치운 적도 있으며(모든 책을 이런 속도로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소설 등의 책이나 가능하다), 일주일에 한권 혹은 한달에 한권은 꼭 책을 읽었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지냈던 기간이 10년은 지속되었던 것 같다. 주로 소설, 에세이, 자기계발서를 중심으로 읽던 책은 인문학과 철학으로 확장되었다. (사실 2013~2016년 즈음에 인문학과 철학이 한창 인기였는데, 나 역시 이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인문학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들이 많았으며, 유행에 따라 인문학 책들도 많이 출판되었다. 그때 구매했던 책들이 전자책을 포함하여 200권은 족히 넘을 것이다. 물론 아직 읽지 않은 책들도 많다. 그 정도로 나는 책이 좋다.
내가 책을 좋아했던 최초의 사건은 이랬다. 초등학교 저학년때 친구집에 놀러갔었다. 그때까지 나는 교과서 외에 책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집에 책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도서관이라는 곳이 존재하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책을 접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날 친구집에 놀라갔던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친구는 나에게 자랑이라도 하듯이 책들을 하나씩 꺼내며 자신이 읽었던 책들의 내용을 얘기해주었다. 언제나 새로운 것은 흥미롭고 신비롭다. 그날 친구가 전해주었던 이야기와 책 속의 그림들이 꽤나 흥미로웠지만 주위에서는 동일한(혹은 유사한) 책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매일 친구 집에 놀러가는 것이었다. 친구 집에 가서 친구와 나란히 앉아 책을 읽었다. 가능하다면 친구의 집에 있던 모든 책들을 내 머릿속에 저장해두고 싶었다. 그래야 집에 돌아와서도 머릿속에 있는 책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서 언제든지 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불행히도 친구는 몇 달 후에 이사를 갔다. 어린 시절 유일하게 책을 좋아했던 친구였고, 그 친구가 있어야 읽을 수 있는 책들이었다. 친구가 떠남과 동시에 나 역시 책과 멀어진 삶을 살았다. 이것이 내가 책이라는 것에 흥미를 느낀 최초의 사건이었다. 아마도 흥미로웠던 책의 내용들 이면에는 친구가 위대해 보이는 동경심도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 책이라는 것은 내가 절대 가질 수 없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때 친구 집에서 모든 책들을 읽었다면 동경심은 사라졌을까?
이후 내가 책에 다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났던 친구의 영향이 컸다. 또 내가 돈을 벌게 되면서 책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돈이라는 것은 참 좋은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나는 경험을 통해 빈곤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돈이 없으면 친구들과 어울려서도 늘 얻어먹어야 하고, 눈치를 봐야 하고 소심해진다. 돈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책이 세상에 넘쳐나도 읽을 수 없고 그만큼 다른 사람들보다 간접 경험을 할 기회가 적다. 빈곤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내가 다시 책에 관심을 갖게 된 두번째 계기는 사회생활 중에 만난 친구 덕분이었다. 물론 영어를 배워보겠다는 목적이 더 컸지만 이것을 계기로 다시 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읽기 쉬운 영어책을 찾다 보니 로맨틱 소설들이 대부분이었다. 영어책을 읽는 것에 자신감이 붙은 이후부터는 에세이까지 장르를 확장해 나갔지만 인문학은 역부족이었다. 인문학이나 철학책을 원서로 읽어 보기 위해 몇 번 시도했지만 어려운 단어들을 일일이 찾아가면서 읽고 있자니 내가 책을 읽는 것인지 책이 나를 읽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후 내가 책을 읽는 패턴은 이렇다. 소설이나 에세이는 영어로 읽되, 인문학이나 철학은 한글로 번역된 것을 읽는다. 가끔은 번역이 더 어려울 때도 있다. 그럴 때에는 원서도 같이 구매하여 비교해가며 읽는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그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생각도 한다. 책은 힘든 삶에 대한 도피처였고 위로였다. 책을 읽는 순간에는 나 역시 책 속의 등장인물이 된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을 들여다보면 현실에서의 나 자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삶을 지켜보면 더 이상 내 문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프리카의 한 부락에 갑자기 나타난 반란군으로 가족과 헤어지고 주인공 스스로는 살아남기 위해 반란군에 가입하여 살상무기로 변해버린 삶을 보면서 내 문제 따위는 문제라고 정의하기에도 창피했다. 흑인으로 태어나 평생을 백인들의 학대와 모욕을 참고 살았던 주인공의 삶과 비교하면 나의 빈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최소한 나에게는 자유라는 것이 있었으니까..그렇게 나는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들로부터 위로를 받았다. 사실 책을 읽다 보면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 소설의 경우 작가의 창작물이기는 하지만 책을 읽는 중에는 ‘이건 허구인데 감동받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은 끼어들 틈이 없다. 픽션이던 논픽션이던 나의 몰입도는 동일하며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고스란히 나에게 전달된다.
나는 책으로부터 수백개의 다른 삶을 간접 체험해왔다. 그 중에는 가슴 아픈 삶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한결같이 좋은 친구였고 스승이었다. 덕분에 나는 식견을 넓힐 수 있었고 내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들을 가질 수 있었다. 그때 당시에는 단순히 책이 좋아서 세상의 모든 책을 흡수하고 싶었다. 책을 통해 지식이나 지혜, 식견을 얻어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즐거웠다. 살면서 유일하게 즐기면서 했던 것이 영어 공부와 독서였지만 이것들은 내 인생을 바꿔 놓을 만큼 큰 영향을 미쳤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즐거웠기 때문에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논어 6편 옹야편에는 이런 말이 실려 있다.
知之者不如好之者 지지자불여호지자
好之者不如樂之者 호지자불여낙지자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라는 뜻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천재를 만나보지 못해서 그들을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글쎄..이기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긴 하지만..) 즐겁게 하는 사람들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은, 그들의 지속력이 더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 모든 일을 다 즐겁게 할 수는 없다. 단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만나게 되면 가장 오랫동안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일에서 만큼은 빛을 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즐겁게 하는 사람을 이기기 힘들다는 말은 끈질기게 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의미와도 같다. 단순히 노력만으로 어떤 하나의 일을 10년간 지속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즐겁기 때문에 10년이라는 시간동안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모든 내용을 게걸스럽게 흡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현재 10년간 차곡차곡 쌓아온 내면의 양식을 하나씩 꺼내 먹으면서 살고 있다. 더 이상의 채우는 삶은 불가능하다. 채우는 것도 마음의 여유가 있고, 시간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미 수차례 얘기하고 있지만 달리는 경주마에 올라탄 이상 눈에 보이는 성과가 중요하지 내면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10년간 쌓아온 식견(지혜라 불러도 좋고 간접 경험이라 불러도 좋다)이 영원해야 할 것 같지만 추가적인 누적 없이 하나씩 꺼내 쓰기만 하면 쌓아 두었던 것 역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직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20~30군데 지원서를 제출했지만 모두 서류에서 떨어졌던 적이 있다(좋던 싫던 이력서를 지원해야는 상황이 많았다. 어떤 때는 진짜 이직이 시급했고 또 어떤 때는 현재의 내가 시장에서 잘 팔리는지 알고 싶어서 지원하기도 했다). 하루하루가 초조한 가운데 주위 친구나 후배들은 어쩜 그리도 이직을 잘 하는지..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었다. 나에게만 계속 닥쳐오는 불행이 영원할 것만 같아 불안하고 무서웠다. ‘누나도 곧 될꺼에요’ 혹은 ‘눈을 조금만 낮추면 가능할꺼야’라는 위로의 말들도 형식적이고 상투적으로 들렸다. 원하는 것을 얻은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위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분명 그들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얻은 귀한 결과였을텐데도 나 자신이 힘든 상황에서 다른 이들의 위로는 귀찮고 불편했을 뿐이었다. 그때 나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라는 책이었다.
저 점을 보라. 저것이 우리의 고향이다. 저것이 우리다.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당신이 아는 모든 이들, 예전에 삶을 영위했던 모든 인류들이 바로 저기에서 살았다. 우리의 기쁨과 고통의 총량, 수없이 많은 그 강고한 종교들, 이데올로기와 경제 정책들, 모든 사냥꾼과 약탈자, 영웅과 비겁자,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부,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 아버지와 어머니들, 희망에 찬 아이들,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도덕의 교사들, 부패한 정치인들, 모든 슈퍼스타, 최고 지도자들, 인류 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여기 햇빛 속을 떠도는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이다.
지구는 우주라는 광막한 공간 속의 작디작은 무대다. 승리와 영광이란 이름 아래, 이 작은 점 속의 한 조각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장군과 황제들이 흘렸던 저 피의 강을 생각해보라. 이 작은 점 한구석에 살던 사람들이, 다른 구석에 살던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그 잔혹함을 생각해보라. 얼마나 자주 서로를 오해했는지, 얼마나 기를 쓰고 서로를 죽이려 했는지, 얼마나 사무치게 서로를 증오했는지를 한번 생각해보라.
작가가 전하고 싶은 내용은 다르겠지만 나는 주로 단편적인 문구에서 내 편의대로 이해하고 교훈을 얻는 경우가 많다. 즉,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보다는 내 경험에 비추어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코스모스라는 책에서 얻은 교훈은 다음과 같다. 광활한 우주에는 78억명의 인류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78억명 중 내가 가장 불행한 삶을 살고 있을까? 78억개의 불행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나의 불행은 몇 번째에 위치할까? 가장 불행할까? 아니면 누군가의 불행보다 덜 불행할까? 여전히 계급의 차이가 존재하는 인도에서 하층민으로 태어났다면 나의 불행은 지금보다 더했을까? 또는 ‘샤리아 법’의 적용을 받는 국가에서 살고 있다면 나의 불행은 지금보다 더했을까? 이러한 생각을 하면 지금의 내 불행은 참아 볼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내게 벌어지는 일들을 불행으로 생각하지 않는 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죽을만큼 큰 일은 아니라는 위안은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한번 위로 받은 영감이나 간접 경험은 한번 사용하면 사라지는 것 같다. 또다시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면 예전에 위로 받았던 것들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내면에 차곡히 쌓여 있는 간접 경험이 소멸된다는 것이 가능할까? 실제로 그럴리가 없다. 간접 경험이 내면에 쌓여 있다는 것은 나라는 사람의 ‘채’에 걸러져 완전히 내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간접 경험은 고스란히 나의 경험이고 지혜이고 식견으로 남는다. 그런데 어떻게 소멸될 수 있겠는가? 소멸이 아니고 묻히는 것일 것이다. 더 깊숙한 내면으로 가라 앉는 것일 것이다. 이미 본인의 역할을 다하고 더욱더 나와 하나가 되기 위해..
그렇게 꺼내 쓰기만 한 기간이 8년이다. 쌓아왔던 시간이 10년 임에도 아무것도 쌓지 않고 살아온 8년만에 모두 끄집어 내어 사용하다 보니 어느 사이에 바닥을 보였고 공허했다. 외적으로 이룬 것은 많을지 모르지만 내적으로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더 이상 나를 위로해줄 수 있는 것이 남아있지 않은 현재 나의 삶은 황폐하다. 가끔 궁금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위로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한국인 성인 중 48%가 1년에 1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기사에서 읽었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는 책이 아닌 다른 곳에서 얻기 때문에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 역시 인터넷의 기사나 유튜브를 통해 필요한 많은 정보를 얻는다. 가장 쉽고 빠르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은 정보를 얻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니다. 책은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위로이면서도 견문과 식견을 넓혀주는 매개체이다. 즉, 나의 삶과 함께하는 78억명의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연장과도 같다. 그들의 아픔을, 슬픔을, 기쁨을 같이 공감하면서 친구로서 한 세상 잘 살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개체이다. 어차피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는 사람 때문에 힘들지만 그들로부터 위로를 받는다. 무엇보다 나에게 기쁜 일이 생겼는데 아무도 함께해줄 사람이 없다고 상상해보자. 슬픈 일을 함께 해줄 사람이 없는 것보다 기쁜 일을 함께 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더 슬픈 일일 것이다. 외부와 차단된 혼자만의 세상에서 살아왔던 동안 공감능력이 많이 떨어졌음을 고백한다. 나의 슬픔과 기쁨을 노출하지도 않았지만 타인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 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이것이 현재 내가 행복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겠지.
지금부터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은 매우 간단하다. 나 자신을 갉아먹고 살았던 삶에서 나를 채우는 삶으로 바꾸는 것이다. 내 방에 넘쳐나는 책들 중 읽지 않고 장식용으로 비치해 두었던 책들을 찾아 읽을 것이다. 대부분은 인문학과 철학 책들이다. 바쁜 와중에 틈틈이 책을 읽긴 했지만 모두 기분 전환 용도이거나 머리를 식히기 위한 용도였기 때문에 소설이나 짧게 읽을 수 있는 책들뿐이었다. 이제는 내 인생을 자세히 바라보고 인간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인문학과 철학책을 많이 읽어보려고 한다. 하지만 나의 내면을 다시 채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당연히 지금도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함께 사는 삶은 뭐가 다르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라고 완전히 격리된 채 살아왔을까? 그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내가 말한 함께 하는 삶은 진정으로 함께 하는 삶이다.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거나 체면치레를 위해 행하는 행동이 아닌 내면에서 우러나는 행동들을 말하는 것이다. 먼저 그 시작은 가족이었으면 한다. 사실 바쁜 하루하루를 사는 동안 가족에게조차 소홀했다.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가족이 눈에 보였을리 없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삶이란 목표에 집착한 나머지 목표를 이루는 과정만 중요하고 그 외의 것은 중요하지 않는 삶이다. 그러니 나의 감정이나 삶 자체가 중요할리 없다. 의도하지 않게 가족들에게 상처 되는 말과 행동을 가장 많이 했을 것이다. 이제는 가족들에게 나의 사랑을 보여주고 싶다. 그나마 나의 부모님이 그들의 시간을 나에게 허락해줄 수 있는 시간이 남아있는 동안만이라도..
뿐만 아니라 이기적이었던 나를 묵묵히 지켜봐준 친구들도 챙겨야겠다. 친구들은 나의 불성실한 태도에 지쳤을 것이다.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것이 친구는 아닐텐데도 여전히 내가 친구로 남아있도록 허락해준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아무탈 없이 잘 지내기를 바란다. 우리는 수백억 년 동안 저 먼 우주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지금 현재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일 것이다. 광활한 우주에서, 그것도 지구에서 함께 살고 있는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나는 꿈에도 격차가 있다는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꿈의 격차는 빈부의 격차 때문이라는 것도 옳다고 생각한다. 나는 간절히 바란다. 최소한 꿈에는 격차가 없기를.. 최소한 빈곤한 사람들도 꿈에서는 자유롭고 더 높은 삶을 꿈꾸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이 내 인생으로부터 희망을 찾기를 바란다. 옛말에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집이 그랬다. 새 옷을 사거나 외식을 하거나 책을 구매하는 등의 행위는 내가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 였다. 돈을 벌었을 때에도 중소기업 연봉이 얼마나 되었겠는가? 그동안 얼마나 저축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여전히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않다. 나 자신을 믿고 자존감과 자신감이 높아지면서 빈곤하다는 것은 더 이상 핸디캡이 아니었다. 당신도 그러길 바란다. 작은 성취가 반복되어 성공 습관이 몸에 베길 바라며,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갖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길 바란다. 나처럼 너무 늦지 않은 삶을 살길 간절히 바래 본다. 나와 같이 매일 매일이 전쟁과 같은 치열한 삶이 아니기를 바란다. (매일 분, 초 단위로 시간을 계산하면서 산다면 분명 은수저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삶을 살고 있는 나는 확신할 수 없다. 죽는 순간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이미 얘기했듯이 또 다시 이 삶을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것을 보면 분명 금수저와 은수저가 인생의 정답은 아닐 것이다)
부디 나 자신과 당신의 오늘이, 미래가 안녕하고 행복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