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스러운 시대의 진정한 후계자 - 캡틴 아메리카 : 브레이브 뉴 월드
감독 줄리어스 오나, 주연 앤써니 마키, 해리슨 포드, 캡틴 아메리카 : 브레이브 뉴 월드, 미국, 2025.
누군가의 뒤를 잇는다는 건 참 부담스러운 일이다. 성군 뒤에 성군 없고, 폭군 뒤에 폭군 없다고 했다. 잘했던 사람 뒤를 이어봐야 아무리 노력해도, '음, 이전이랑 비슷하네' 정도의 평가가 고작일 터이다. (만약 훨씬 더 잘한다면, 당연히 그 앞 왕의 평가가 바래겠지.) 마찬가지로 폭군 뒤는 오히려 부담이 없다. 아무리 못해도 '그래도 전보다는 낫네' 싶을 터이다. 무림에도 비슷한 말이 있는데, 기무라 락Kimura lock - 속칭 기무락이라 불리는 전설적인 손목꺾기 관절기를 주짓수에 남긴, 불세출의 유도가 기무라 마사히코는, 얼마나 뛰어난 업적을 남겼는지, 기무라 앞에 기무라 없고, 기무라 뒤에도 기무라 없다, 라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 지금보다 훨씬 규칙이 적고 거칠던 90년대 UFC 초창기를 휩쓸던 그레이시 유술 가문조차도, 기무라의 기술들은 경계할 정도라고 했다. 나 역시 주짓수에 잠시 몸을 담았을 무렵, 그 정교한 기술의 엄밀함에 치를 떨엇던 적이 있다. 배우기 어려운만큼, 빠져나가기나 뿌리치기도 참 어려웠다.
여기, 평범한(?) 몸으로, 인간을 초월한 영웅의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 한 사내가 있다. 사실 그조차도 평범한 이는 아니다. 그는 전쟁과 의료 구조 작전을 한번에 수행하는 특수부대 출신이며, 현역 때는 특수장비 날개를 달고 공중을 누볐고, 퇴역 후에도 아침마다 달리기와 근력 운동을 할 정도로 성실근면한 모범적인 군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능력을 몇 단계나 올리는 혈청을 맞은 캡틴 아메리카의 상대가 되진 못했다. 브루클린의 가장 가녀리지만, 용감하고 정의로웠던 소년은, 신체 능력을 비약적으로 올리는 혈청을 맞은 뒤, 전속력으로 달려 자동차를 따라잡고, 한 팔로 날아오르는 헬기를 잡아 끌어내리며, 고공에서 낙하산 없이 방패 하나만 들고 뛰어내려도 (물론 낙법을 치긴 하지만) 상처 하나 없이 벌떡 일어나 덤비는 적들을 뻥뻥 걷어차 날려버리는 초인이 되었다. 배트맨처럼 많은 장비를 지원받는다 해도, 평범한 사내는, 이 캡틴 아메리카의 조수, 팰컨 역할을 수행하는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모든 전쟁이 끝나고, 서사의 마지막에서, 혈청이 중화되어 늙은 영웅은, 자신의 방패와 함께 세상을 지켜나갈 사명과 의무를, 자신의 조수이자 동료에게 맡긴다. 제2대 캡틴 아메리카의 지위는, 미군 출신 영웅 조수 팰컨에게 그렇게 계승된다.
성군 뒤에 성군 없다고 했다. 2대가 아무리 뭘해도 1대 캡틴 아메리카와 비교될 수밖에 없다. 그 유명한 제갈량이 죽고 위나라에서 귀순한 강유가 뒤를 이었을때, 사람들은 전만 못하다고 입방아를 찧었고, 강유의 측근들은 잡아다가 모두 혀를 뽑겠다고 별렀다. 그조차도 젊었을 적 제갈량의 전략을 간파하며 오히려 역공까지 먹인 출중한 명장이었으나, 강유는 오히려 측근들을 말리며, 자신이 제갈량보다 못한게 당연하다며 넘겼다. 2대의 심정도 그와 같았을 터이다. 게다가 하필 1대는 백인이고, 2대는 흑인이다. '자네가 아무리 그래도 자넨스티브가 아닐세. 무리하지 말게.' 캡틴 아메리카의 본명까지 거론하며, 1대를 따라잡으려 하지 말라는 세간의 평가에 피로까지 겹쳐, 범인(凡人) 출신의 2대 캡틴 아메리카는, 관객들이 들으라는 듯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혈청 맞을걸 그랬어.' 라며 농담조로 투덜거린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혈청을 맞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기에 그의 액션은, 그 어벤져스와 함께 우주를 누비며 앞을 가로막던 적들을 맨손발로 퍽퍽 쳐날리던 캡틴 아메리카와 달리, 무척 사실적이다 못해 처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주말 여가로 헤비백 줄 세워놓고 두드리다 터뜨려 없애던 1대 캡틴 아메리카와 달리, 2대 캡틴 아메리카는 특히나 장비 없이 싸울때 좀 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맞기도 많이 맞는다.
그러나 오히려 그래서, 2대 캡틴 아메리카는 더 친근하고 매력적이다. 물론 그에게도 캡틴이 따라잡을 수 없는 장점이 있는데, 그는 날고 기는 미 공군 특수부대 출신으로서, 그야말로 아이언맨이나 워 머신도 따라잡을 수 없는 압도적인 공중전의 기량을 보여준다. 와칸다 왕국에서 공수받은 비브라늄 날개를 장착했을때, 그는 기발한 전략으로 날개를 써서 적들을 꺾고, 독보적인 기량으로 하늘을 날며 전투기들을 제압한다. 하늘을 날 수 없어 늘 토르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야 했던 1대 캡틴과는 차이가 있다.
영화의 서사는, 여러 평론가들이 말했듯이, 엉성하고 늘어진다. 주연 앤써니 마키뿐 아니라, 왕년의 명배우 해리슨 포드가 날고 기어도 이 서사에 기력을 불어넣을 수는 없다. 내가 생각해도 마블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듯 보인다. 그러나 오랜만에 돌아온 2대 캡틴 아메리카는 심히 매력적이다. 사실 나는, 유튜브에서 편집된, 디즈니 드라마인 팔콘과 윈터솔져의 한 장면을 보고, 그때부터 2대에게 좀 더 관심을 가지긴 했다. 혈청을 맞지 않은 상태에서, 2대는, 물려받은 1대의 비브라늄 방패를 그와 똑같이 온전히 다룰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처음 1대 캡틴을 만났을때처럼, 끊임없이 달리고 팔굽혀펴기를 하고, 방패를 던지고 받는 연습을 하며 마침내 그 못지 않는 역량을 달성한다. 1대 캡틴 역시 아이언맨처럼 첨단과학으로 무장하거나 닥터 스트레인지처럼 신통력을 지니지 않았어도, 강력한 체력과 근력, 각종 무공, 그리고 무엇보다 뛰어난 지도력과 의로움으로 어벤져스를 지도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이 영화의 중점은, 2대가 1대를 어떻게 계승하고, 어떻게 자신의 결핍을 극복하는지 를 중점으로 보아야 한다. 사실 이전의 연작인 인피니트 사가 또한 계승과, 결핍 극복에 관한 내용이 많았다. 토르는 자격지심을 극복하고 아버지 오딘의 뒤를 이어 참된 왕이자 진정한 신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개망나니 파락호처럼 굴었던 토니 스타크 역시 아버지의 진정한 유산을 물려받아 정의로운 군수사업자로 거듭났으며, 어린 스파이더맨은 아이언맨을 어른삼아 옛 상실에 대해 벗어나고자 노력했고, 캡틴 아메리카의 결핍은 이미 말할 것도 없다. 그러한 맥락에서 볼때 2대는 비록 신체적인 점에 대해서는 1대를 따라갈 수 없을 지언정, 가장 훌륭한 의기와 노력을 지녔다. 다만 영화 자체는, 이전의 매력을 따라가기에는 조금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