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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ke Mar 21. 2024

로마의 중심지며 '도시'의 모델이 된, '포로 로마노'

2천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믿기 힘든 고대 도시의 스케일

포로는 고대 로마의 시민 생활 중심지였습니다.


‘포로(Foro)’라는 뜻은 ‘공공 광장’이라는 의미로 영어 "포룸 Forum"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포로 로마노'는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이자 로마 시민들의 '대화의 장'이었습니다. 기원전 1세기 '시저'와 그의 후계자 '아우구스투스'가 그 기초를 세운 후, 공화정 시대의 공회당과 여러 신전, 원로원, 개선문, 상점이 들어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좌) 포로로마로의 현재 전경 / (우) 포로 로마노 전성기 상상도 (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그러나 이후 정치활동의 중심이 '원로원'에서 황제의 궁전이 있는 '팔라티노 언덕'으로 옮겨지면서, '포로 로마노'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포로 로마'노는 로마가 몰락한 이후 일부 건물만 사용되고 나머지는 방치되어 훼손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발굴되기 시작하여 현재도 계속 발굴과 복원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현재 복원된 건축물의 일부는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2,000년이나 된 다른 건축물과 조화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로마시대 건축물의 원형을 짐작하기에는 도움이 되죠. 세월이 흘러 흘러 언젠가는 복원된 건물의 새하얀 대리석도 퇴색해 수천 년 전의 건물들과 하나가 되겠지요.     


현재, 포로 로마노의 옆을 가로지르는 넓은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은 '베네치아 광장'에서 '콜로세움'에 이어지는 <포리 임페리알리 대로>인데요, 2차 대전 당시 이탈리아의 독재자였던 '무솔리니'가 '포로 로마노'의 유적지를 파괴하면서 만든 것입니다.  '포로 로마노'의 중앙에는 ‘성스러운 길’이라 불리는 <비아 사끄라>가 있습니다. 이곳은 외국 원정에서 승리한 장군들이 개선 퍼레이드를 벌였던 신성한 거리입니다. 이 길의 양쪽에 중요한 유적이 줄지어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가시면 주요한 유적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럼 '포로 로마노'에는 어떤 유적들이 있는지 살펴볼까요? 

(좌)'포리 임페리알리 대로' 전경 / (우) '비아 사끄라'

'포로 로마노'의 입구 바로 오른쪽에 열주만 남아 있는 <에밀리아의 바실리카>가 있습니다. 이곳은 이전에 주로 상거래가 이루어졌던 곳입니다. 유적의 바닥에 깔린 돌을 들쳐보면 아직도 여기저기에 불탄 화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하네요. 그렇다고 유적지에 함부로 들어가 돌을 들추거나 하시면 절대로 안됩니다. ;)

'에밀리아의 바실리카'는 상거래가 주로 이뤄지던 장소

'포로 로마노'에는 여러 개의 개선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포로 로마노'와 '콜로세움'  주변으로 3개의 개선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콜로세움' 바로 옆에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있고,  '포로 로마노' 안쪽으로 이어지는 대로에 2개의 개선문이 있습니다. '콜로세움'에서  '포로 로마노'와 '팔라티노 언덕' 중간에 이어지는 길에는  <티투스 개선문 Arco di Tito>이 위치해 있습니다. 이 개선문은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개선문으로 아치가 하나인 단공식 개선문입니다. 81년 예루살렘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여 세웠는데요, 티투스 황제를 기리기 위해 건축되었습니다. 개선문 내부는 많이 부식되었지만, 예루살렘에서 약탈한 전리품을 들고 개선하는 로마병사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포로 로마노' 북서쪽 끝에 위치한 백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개선문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입니다서기 240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자신의 재위 10년과 그의 두 아들이 전쟁에 승리한 것을 기념해서 세운 것입니다. 이 개선문 역시 조각들이 많이 부식되기는 했지만 ‘파르타오’와 ‘아라비아’ 전투에서 승리한 황제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좌)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 (중) 티투스 개선문 / (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콘코르디아 신전>은 기원전 367년 평민들도 집정관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리키니우스 섹시티우스법’의 제정을 기념해 세워진 신전입니다.  로마 공화정과 로마 제국의 공식 명칭인 'SPQR'이라는 단어가 이때부터 사용되었습니다. 'SPQR'은 '로마 원로원과 시민'을 뜻하는 라틴어 문구의 약자입니다. 즉 로마를 상징하는 문장입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주인공 막시무스가 로마에 대한 증오로 팔뚝에 새겨진 문신 SPQR 표식을 긁어내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이 문구는 현재 로마 시의 공식 문장에 지금도 쓰이고 있습니다. 

(좌) 콩코르디아 신전 터 / (중) 콘코르디아 신전 복원도 (이미지 : 위키피디아) / (우) 'SPQR'이 새겨진 '율리우스 시저'의 동상

<라피스 니제르 Lapis Niger> ‘검은 대리석’이라는 뜻으로 로마의 창시자 로물루스의 무덤이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포카 황제 기념 원주 Colonna di Foca> 동로마 제국 비잔틴의 ‘포카’ 황제가 로마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608년에 세워진 것입니다. 포로 로마노 유적 중 가장 늦게 세워진 것입니다.

(좌) 로마를 세운 로물루스의 무덤으로 알려진 '라피스 니제르' / (우) '포카 왕제 기념 원기둥'

<로스트라>는 군중집회 시 대중 연설에 사용되었던 연단입니다. 이곳에서 집정관 키케로가 처형되었고,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가 매춘 행위를 한 곳 이라고도 합니다. 

(좌) '로스트라' 현재 / (우) 광장 연단으로 사용되었던' 로스트라'의 상상 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마메르틴 감옥 Carcere Martima>은 지하감옥인데요, 사도 베드로, 사도 바오로가 갇혀 있었던 곳입니다. 함께 수감된 죄수들에게 전도하고 세례를 베풀기도 한 곳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베드로와 바오로가 묶여있던 돌기둥과 기적의 샘터가 남아있어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성지순례 시 이곳을 찾고 있습니다.

(좌) '마메르티노 감옥 외관 / (우) 지하에 감옥시설, 예수의 제자 베드로와 바울이 갇혀 있던 곳

<카이사르 신전 Templum Caesar>은 좀 남다른 신전입니다. 보통 신전은 신을 위해서만 세우는데 이 신전은 인간을 위한 최초의 신전이라고 합니다. 암살된 '율리우스 시저'의 시신을 화장했던 장소에 세운 것으로, '아우구스투스' 대제가 시저를 신격화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도시 안에서는 화장식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예외가 있었는데요, 바로 기원전 44년 3월 이곳에서 시저의 화장식을 거행했습니다. 이 날 로마에는 비가 내렸지만 시저의 화장식을 했던 이 장소만은 비가 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믿거나 혹은 믿지 않거나 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중앙에 지붕이 보이는 곳이 '카이사르 신전'

<바실리카 줄리아 Bacilica Giulia>는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곳은 로마의 법이 만들어진 법원이었으며 많은 재판이 이루어진 곳입니다. 기원전 54년 '시저'에 의해 건설이 시작되어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 대제가 완성하였습니다. '브루투스'가 자신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곳이기도 한데요, 이 건축을 명령했던 줄리어스 시저의 이름을 따서 ‘줄리아의 바실리카’가 되었다고 합니다.

(좌) 바실리카 줄리아 현재 / (우) 바실리카 줄리아의 복원 이미지 (출처 : 나무위키)

<베스타 신전>은 ‘화로의 여신’ 즉 ‘불의 여신’을 모시기 위해 4세기경에 지어진 작은 원형신전입니다. 불의 여신 베스타는 공화국의 수호신이므로 신전을 지키는 것은 공화국의 안전을 지키는 중요한 역할이었습니다. 이곳은 꺼지지 않는 성화가 타오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불은 귀족 가문에서 선발된 6~10세의 6명의 처녀 제관들이 지켰습니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높은 지위와 특권을 부여받았는데요, 발탁된 후 30년 동안 임무를 수행했으며 임무기간 동안은 결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를 어기면 벌로 산채로 매장하였다는 무서운 얘기도 전해진다고 하네요. 하지만 임무기간을 잘 마치면, 평민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도록 허가받았다고 합니다. 신전 뒤쪽에 이들이 살던 베스탈리의 집이 있습니다. 지금은 집터만 남아 있습니다. <베스탈리의 집 Casa delle Vestali>인데요. 바로 베스타 신전을 지키던 여섯 명의 제관이 살던 곳입니다. 이 집은 중앙 정원을 둘러싼 사각형 건물이었습니다. 머리 부분이 대부분 없어진 베스탈 조각상들은 3-4세기경에 제작된 것들입니다. 조각상들 중 비교적 잘 보존된 것은 ‘로마 국립 박물관’에 옮겨져 있습니다. 

(좌) 베스타 신전 현재 / (중) 베스타 신전 복원도 (출처: 나무위키) / (우) 베스탈리의 집 터

<안토니누스와 파우스티나의 신전 Basilica di Antoninus e Faustina>은 '안토니누스' 황제가 죽은 황후 '파우스티나'를 위해 만들게 한 신전으로 황제 자신도 죽은 뒤 이곳에 묻혔습니다. <쿠리아 Curia> '에밀리아의 바실리카' 앞에 있는 벽돌 구조의 건물인데요, 1937년에 복원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공화정 시대 로마의 최고 기관인 원로원 의사당으로 회의가 열렸던 곳입니다. '브루투스'가 회의에 참석하는 '시저'를 암살한 곳도 이 건물의 앞이었습니다. 

(좌) '안토니우스와 파우스티나의 신전' / (우) 카이사르가 암살된 장소인 '쿠리아'

이외 <로물루스 신전>, <막센티우스/ 콘스탄티누스의 바실리카>도 볼 수 있습니다. 바실리카는 거대한 아치와 천장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포로 공공건물의 규모와 웅장함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넓이는 가로 100m, 세로 65m입니다. 이 바실리카는 로마의 다른 바실리카들과 마찬가지로 재판소, 사업 장소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깜삐돌리오 박물관 <콘세르바토리 궁>에 놓인 콘스탄티누스 황제 대리석 좌상의 일부분인 거대한 머리와 팔과 손, 다리와 발의 파편들은 1487년 이곳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좌) 로물루스 신전 / (우) 막센티우스, 콘스탄티누스의 바실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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