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동생은 나보다 두 살 어리다. 어릴 적에 많이 싸웠다. 그 시절 2살 차이라도 '언니' 자리는 확고했는데 서열(?)이 무너진 건 초등학교 5학년 즈음이었다. 뭣 때문이지는 모르겠지만 한 판 싸웠다. 마지막에는 몸싸움을 했다. 붙어서 팔 꺾기를 했는데 참패했다. 내 근육은 헐렁헐렁한 물살이었고 동생은 다부지고 야무진 몸이었다. 그날 이후 전세는 역전돼서 동생에게 한 수 접어줘야 했다.
나는 살도 무르고 대장도 무르다. 수박을 2ㅡ3조각 먹어도 설사가 났다. 반대로 동생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변비가 심했다. 며칠 씩 화장실을 못 가고 배가 아프다고 했다. 여고생이 변비인 경우가 많아서 그런가 보다 했다. 대학 가서는 괜찮아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동생은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3년 정도 하다가 사업을 시작했다. 성격이 똑 부러지고 부지런한 동생은 아침 일찍 가게로 출근해서 큰 유리창을 꼼꼼히 닦고 열심히 일을 했다. 판매일은 불특정 다수를 상대해야 돼서 스트레스가 많았다. 혼자 할 수 없어서 직원을 데리고 장사를 했는데 직원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았다. 힘들어했다. 스트레스는 과식을 불러왔다. 쫄면, 떡볶이, 만두 같은 음식을 시켜 먹는 일이 많았다.
동생은 계속 배가 아프다고 했다. 너무 아파서 동네 방사선과에서 검사를 했다. 장의 한 부위가 좋지 않다고 종합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라고 했다. 병원에서 베체트라고 했다.
병명과 함께 스테로이드가 처방되었다. 스테로이드는 얼굴을 보름달처럼 부풀게 하고 뼈는 약하게 만든다. 골다공증이 오고 생리가 끊어졌다. 스테로이드를 먹는다고 병이 호전되지는 않았다. 장의 기능은 약하고 약해져서 혼자 힘으로는 변을 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동생은 관장을 하면서 살았다. 뭘 먹으면 늘 더부룩하고 가스가 찬다고 했다. 베체트가 헐어놓은 자리가 깊고 오래돼서 그런 것 같았다.
우리 집은 2녀 1남이다. 엄마는 8남매의 맏딸이었고 아버지는 7남매의 맏아들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랑 한 집에 살았다. 엄마는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웃기는 이야기인데 50년 전에는 그랬다. 나는 첫 딸이라서 환대받았다. 동생은 둘째 딸이라서 홀대받았다. 엄마는 자주 '네 동생을 낳고 나서는 부끄러워서 동네에 나가기 힘들었다...'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여동생 앞에서 또 딸이라는 소리를 듣고 화가 나서 술 마시러 갔다고 다른 친척들이 있는 자리에도 큰 소리로 말하곤 했다.
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말씀이 많았고 우리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들어야 했다. 그것이 진실인지 정당한지 상처인지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냥 뇌리에 박힐 때까지, 각인이 될 때까지 들어야 되는 이야기였다.
이런 이야기들이 아이에게는 치명적이라는 사실은 30대 중반에 상담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태어나는 순간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가 '딸'이라는 것이 몹시 크고 깊은 상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뒤집어 말하면 알지 못한채 살아가는 경우도 많다는 이야기가 된다. 공부를 하면서 눈물을 흘렀고 동생에게 죄책감과 미안함이 들었다.
엄마는 부지런하고 착하신 분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들쭉날쭉한 성격에 힘들어하셨고 시동생이 많은 집안의 맏며느리 노릇에 기진맥진해하셨다. 엄마의 풀리지 않는 분노와 억울함은 여동생에게 흘러갔다. 가끔씩 '저거는 못됐다. 저거는 키도 작고 병신이다' 라는 모진 말을 내 앞에서도 했다.
엄마는 그런 태도가 자식에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았을까.. 우리 엄마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식들을 편애하는 태도를 내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나도 자식을 키워보니 '사람이 어째 그러냐...'에서 '사람이라서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한다. 우리는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존재이다. 그러고 싶지는 않은 뿐, 그럴 수도 있는 존재 같다.
나는 동생의 지병과 자신을 학대하는 듯한 삶의 방식이 결핍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동생이 일에 빠져들 때 표정이 아주 무섭다. 자신의 존재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꼭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도 아니었는데 '돈'에 대해서 집착을 보였다. 제부와는 연애를 오래 하고 결혼을 했는데 결혼 후 제부에게 과도한 통제를 했다. 언제 어디서 무얼 하는지 다 알아야 했고 자기 손 안에서 주물러 대고 싶어 했다.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내 권유로 부부 상담도 하고 종교 생활도 했지만 집착과 통제가 없어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제는 절에서 진행하는 인터뷰룰 참관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아이 같았다. 식당을 창업해 놓고 서너 달이 지나면 관리를 하지 않고 매장에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으면 장인, 장모와도 몸싸움을 했다고 한다.
10년 동안 매일 아침 300배를 한 그녀 얼굴은 연꽃 같았다. 남편이 응당 해주어야 할 일이나 처가에 대한 존중을 바라지 않았다. 그녀에게 그 일은 이미 지나가는 바람 한 자락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담담히 일을 하고 자신의 생을 가꾸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편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조금 더 있다가 퇴직을 하면 필리핀에 가서 봉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 절의 해외 봉사는 일의 강도가 아주 높지만 그녀라면 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남편이 몸싸움을 일으킨 날을 이야기해 주었다. 울었다. 나는 그 상황의 긴장과 두려움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노련하고 경력이 많은 경찰관처럼 행동했다. 쉽지 않은 일이다. 경찰관은 타인과 대치하지만 그녀의 대상은 남편이었다. 가족이었다. 검은 그림자처럼 엄습해 오는 두려움에 빠지지 않고 남편 마음을 온전히 안아주는 일은 오직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남은 생의 시간 동안 그녀에게 행운이 가득하기를 빌었다.
아버지 생각을 했고 남편 생각을 했다.
젊은 아버지를 보면서 불안에 떠는 어린 나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날의 아버지보다 나이가 더 많다.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어렸던 아버지는 '나를 좀 봐달라고, 사랑 좀 줘~~~'라고 말하고 있었다.
우리의 모든 비명은 그렇다.
'사랑해 줘... 사랑받고 싶어...'
동생은 많이 아플 것 같다. 자신의 통증이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좌절된 순간 시작되었다는 걸, 태어난 순간자신을 환영하지 않는 부모 때문이라는 걸 인지할 때까지...
알고 싶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무의식은 이미 알고 있다. 통증은 슬픔에 가득 찬 결핍이 보내는 신호가 아닐까... 무의식에 잠겨 있는 고통을 의식으로 떠올려 바라볼 수 있을 때, 그것을 꼭 안아줄 때 통증은 사라질 것 같다. 오랜 결핍과 갈망은 오직 자신만이 채워 줄 수 있다. 그 공허함은 돈으로도, 사람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다. ego를 넘어서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