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이라는 말은 오래전에 쓰던 말이다. 서점은 시내에 있는 대형 매장에 어울리는 것 같고 동네에 있는 작은 가게는 책방이 어울리는 것 같다. 중학생이었을 때 동네 책방에서 책을 구경하곤 했다. 작은 읍내에는 구경할 것도, 갈 곳도 별로 없었다. 서점에서 어슬렁거리면서 책표지를 보면 알 수 없는 세계로 넘어가는 것 같았다. 이 책을 넘기면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저 어려운 책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탐욕(?)스런 마음으로 책들을 바라본 것 같다.
애월에 있는 서점은 귀 옆머리에 새치가 조금 있는 젊은 여인이 꾸리고 있었다. 신축 건물이었는데 공간이 재미있었다. 현관은 1층이었고 정면에 보이는 계단을 오르면 2층이 나오고 살짝 옆으로 눈을 돌리면 3층이 다락방처럼 숨어 있었다. 1층에서 계단을 서너 칸 내려가면 숨어있는 공간이 나오고 마당으로 연결되는 문이 있었다. 마당은 소담하고 정갈했다. 마당으로 제주 하늘이 낮게 내려와 있었다. 뒤편으로 그녀의 살림집이 있었다. 그녀는 책이야기하는 걸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털털한 옷차림은 그녀가 여기 섬사람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날렵한 서울말을 썼지만 마산출신이라고 했다. 서울살이에 별로 미련이 없었고 출판과 책을 좋아한다고 했다. 몇 년 동안 제주에서 독서모임을 주관했다고 한다. 무료로도 오래 했다고 한다.
그녀는 씩씩했다. 속이 꽉 차 있었다.
영업시간이 아닌 오전에 문을 열어주셨다. 눈치가 보인 나는 책을 좀 팔아드려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여행지라서 들뜬 마음으로 표지가 이쁜 것들로 골랐다. 그래봐야 겨우 두 권이긴 했다. <다정한 서술자>와 <자발적 고독>이었다.
여행 다음날 눈을 떠도 바닷가 파도 소리가 맴돈다. 몸은 나른하다. 읽어야 할 책은 <버냉키의 21세기 통화정책>인데 어제 사온 책을 펼친다. 누군지도 모르는 그녀의 글은 단박에 나를 홀렸다.
P110
이와 유사한 특별한 입문 과정이 문학 읽기에도 적용된다고 나는 믿는다. 만약 아홉 살에서 열여섯 살 사이에 에로틱한 체험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는 독서의 희열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 삶은 결코 진정한 독자가 되지 못한다. 물론 신문이나 책을 읽는 방법을 깨우치게 되면서 그 내용을 파악하고 거기서 뭔가를 배울 수도 있으며, 아마도 어떤 분야의 전문가나 학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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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입문 기간은 매우 민감한 시기다. 이 시기에는 정신과 신체의 젊음, 모든 종류의 자극에 대한 예민함과 유연함이 요구된다. 이 기간에 인간의 두뇌가 종이에 인쇄된 일련의 글자로부터 음률과 이미지를 추출하는 방법을 터득하면 이 능력은 영원히 남게 된다. 비록 나이가 들면서 점차 쇠퇴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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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거의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그러한 능력이 지속되는 사람들 오 꽤 있는데 나는 그들에게 부러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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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런 식의 질문을 한다는 건 우리가 세상을 즐길 능력, 즉 이미 존재하는 것과 앞으로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것, 그리고 미처 일어나지 않은 것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들 사이의 경계에서 균형을 잡는 능력을 상실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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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심오한 의미에서 보면 문학에는 젠더가 없다. 성별의 이분법이 적용되지 않고 인간의 심리적 층위까지 관통하는 것이 문학이기 때문이다. 문학 속에서 인간은 양분될 수 없는 총체적인 존재이며 자신의 통합성을 마음껏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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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관객이 화면의 일부로 투영되는 일종의 홀로그램 영화처럼 우리가 그 안으로 온전히 들어갈 수 있는 세계를 구축해야 한다. 그러한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고, 나아가 우리가 그 안에서 머물 수 있다는 환상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인물과 공간을 창조해야 한다. 늘 명확하고 선명하게만 여겨지던 대상들을 마치 램프처럼 다른 각도에서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 그래서 그 빛 속에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갑자기 모호해지고, 익숙한 것들이 낯설어지고, 안심하던 것들이 의심의 대상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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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나마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을 멈추고 타인이 되어 보는 데 독서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매혹적이면서 동시에 치유와 위안을 안겨 주는 체험이다. 책을 읽으며 우리는 타인의 삶에 뛰어들고 타인이 된다. 타자의 눈을 통해 보고, 그의 감각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우리를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는 바로 그 타자처럼 생각한다. 이러한 변신은 지극히 안전하면서 마약과 같은 중독성도 없다. 남자가 여자가 될 수도 있다. 폴란드의 평범한 남자 얀 코발스키 씨가 안나 카레리나가 될 수 있고, 여덟 살짜리 올가 토카르추크가 네모 선장이 될 수도 있다.
어쩌다가 책을 좋아하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초등 2학년인가 3학년인가 그랬다. 학교에 다녀온 나에게 아버지가 선물이 있다고 들뜬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방에는 붉고 진한 양장본 전집이 있었다. 50권이 넘었다. 책 가운데는 금박으로 제목이 쓰여 있었고 그 아래에는 작은 글자로 '세계소년소녀문학전집'이라고 적혀있었다. 책 안에는 초록색실로 꼬아 만든 책갈피용 줄이 달려 있었다. 펼치면 놀라운 이야기가 가득했다. 일상 너머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소공녀, 아라비안나이트, 삼총사에 주홍글씨까지 있었던 것 같다. 방구석에 앉아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흑백 TV시절이었던 것 같다. 재미있는 놀이는 고무줄, 공기놀이, 자치기였다. 책은 아주 귀했다. 그 전집 책은 글자 크기는 작았고 페이지도 많았다. 어려운 책들인데 어린이용으로 번역해서 판매한 것 같다. 그 전집을 만난 뒤 이야기 맛에 빠졌다. 고등학교시절에는 겉멋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책들을 껴안고 다니곤 했는데 내용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강렬한 기억은 어릴 적 읽었던 '이야기' 자체였다.
결말은 어떻게 될까?
세라는 너무 힘들겠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왕은 왜 사람을 죽일까? 나쁘다...
삼총사는 정말 신났겠다!
해피엔딩의 결말을 읽을 때 가슴에서 퍼지는 저릿함은 다른 놀이에서 찾을 수 없었다. 같은 스토리텔링이지만 영화보다 책을 좋았는데 그 이유를 올가가 대답해 주었다.
"인간의 두뇌가 종이에 인쇄된 일련의 글자로부터 음률과 이미지를 추출하는 방법을 터득하면 이 능력은 영원히 남게 된다. 비록 나이가 들면서 점차 쇠퇴하더라도 말이다."
그래, 이거였어! 아홉 살에서 열여섯 사이에 독서에서 느끼는 에로틱한 체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독서의 희열!! 이것을경험한 것이었다.영화는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영상을 보아야 한다. 상상 속 이미지를 만들 틈을 주지 않는다. 관객이 지루해하니까. 영화가 시작되면 감독이 펼쳐 보이는 그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야 한다. 그러라고 만든 것이다.
책은 조금 다르다. 눈동자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굴리면서 시각과 뇌의 통합작용이 이루어져야 한다. 영화처럼 강한 자극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지루한 부분도 많다. 어떤 부분은 머리를 쥐어짜서 유추해야 한다. 무슨 생각으로 이 여자는 이따위 말을 하는 거냐? 뭐 이런 거 말이다. 이런 점이 매력이다. 독서하는 이는 주홍글씨를 읽으면서 자신만의 주홍글씨를 창조해 낸다. 머릿속에는 얼굴이 그려지고 그녀가 입었을 옷을 상상한다. 그녀의 고통을 그려낸다. 가슴에는 흥분이 가득하고 머릿속에는 이야기가 각인된다. 그리고 말하고 싶어 진다.
'너는 그녀가 무얼 잘못했다고 생각해? 네 생각은 어때?'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도대체 그녀가 무얼 잘못했을까 생각한다. 그녀가 무얼 잘못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녀를 비난하고 있는 마음을 보고 흠칫 놀라고 있었으니까..
불완전한 우리가 만들어놓은 미완의 세상에서 미로를 헤매고 있었구나.. 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나도 너도 그렇구나 알게 된다. 그 순간의 가슴 벅참, 벽 너머로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기쁨이 세포 구석구석을 각성시킨다.
제주책방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데, 강남은 100억이라는데,라고 해도 글자들이 추는 춤에 매료당한 사람들이 있었다.
잘 생각해 봐, 100억 벌면 뭐 할 거야?... 응, 놀아야지... 뭐 하고?... 웅, 먹고 마시고,,, 또 뭐 할 거야?... 웅, 놀 거야, 해외여행 가고, 가방 사고, 신발사고, 아파트 사고, 또 뭐 할 거야?.... 웅, 책도 좀 보고... 산책도 하고... 그림도 좀 그리고... 근데 그거... 100억 없어도 하잖아,,, 지금...? 웅 그렇네,,,
긴 시간을 돌아 세상 안에서 형성된 나라는 존재를 가만히 본다. 지긋이 바라보는 어떤 나도 조금씩 느껴진다. 머릿속에서 쏟아내는 말들은 다... 말이야... 그때 읽은 계몽사 소설 속 이야기야... 그리고 그때 너는 아이였어... 그런데 이제는 아이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