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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별 Oct 17. 2022

노란 가을... 그리고 불타오르는 화


 이번 가을은 유난히 설렌다. 홀가분한 독거 중년이라서 그런 것 같다. 밥은 먹고 싶을 때 아무 때나, 먹고 싶은 것만 해 먹는다. 그리고 치우고 싶을 때 정리한다. 딱 하나 정해진 건 우리 몽이 밥이다. 안 주면 곡을 한다. 사람이 내는 소리 같다. 무뚝뚝한 남편도 몽이의 곡소리에는 머리를 흔들며 밥 주러 간다.


 가을이면 입맛이 돈다. 날이 선선해지고 모든 것들이 맛있는 계절이니까. 동네에는 오래된 떡집이 있다. 지나가다 보면 노오란 시루떡이 넓은 떡판 위에 올려져 있다. 큼직하게 잘라져 맛나 보인다. 팥 시루떡도 맛있지만 가을에는 노란 콩고물이 올라간 시루떡이 더 맛있다. 어느 날은 다 팔리고 없었다. 또 어느 날은 바빠서 못 사고, 현금도 없고 휴대폰도 없어서 못 산 날도 있었다. 지난 목요일에는 마음먹고 떡을 사러 갔다.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도 받아왔다. 집에 와서 떡을 야금야금 먹었다. 콩고물이 달콤했다. 반 쪽이나 먹고 부른 배를 두드린다. 아이스크림을 꺼낸다. 아이스크림을 잔에 담고 에스프레소를 끼얹는다. '아, 이렇게 맛있는 걸 생각해낸 사람은 천재다!' 맛난 걸 먹고 기분은 아주 좋아졌다. 자전거를 꺼내 타볼 궁리도 한다.


 저녁에는 단호박죽을 끓였다.

 아들아이가 추석선물로 보내준 단호박이 달고 맛나다. 단호박을 잘 씻어서 칼집을 깊게 낸다. 레인지에 2분 정도 돌린다. 껍질을 적당히 분리한다. 물을 넣고 끓인다. 거의 다 익은 상태이니까 조금만 끓인다. 새로 산 블렌더로 갈아본다. 물렁한 단호박은 금방 물과 섞인다. 냉동실에 있는 쌀가루를 꺼내 물을 조금 넣고 풀었다. 단호박 삶은 것에 넣고 잘 젓는다. 멀건 주스처럼 끈기 없던 단호박은 쌀가루를 만나 걸쭉해진다. 윤기도 돈다. 소금 간을 하기 전에 몽이 것을 조금 덜어낸다. 그리고  설탕 약간, 소금 아주 조금 넣는다. 좋아하는 그릇에 담는다. 따뜻하다. 그릇의 색은 블루, 단호박죽은 노랑이다. 노랗고 따뜻한 것이 목구멍을 타고 뱃속으로 들어간다. 따뜻해진다. 단호박 맛을 아는 몽이가 끙끙거린다. '기다려봐, 식어야지.' 식힌 죽을 몽이에게 준다. 좋아한다.


 시루떡도 노오랗고 단호박죽도 노오랗다. 은행나무도 곧 노오랗게 물들겠지. 마음이 설렌다. 좋아하는 은행나무 길을 상상한다. 가을이면 동네 초등학교에서 시장 사이에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다. 좁지도 넓지도 않은 도로 양쪽으로 키가 크고 튼실한 나무들이 노오란 은행잎을 날린다. 빛이 난다. 그 길에는 목요일마다 목요 시장이 열린다. 규모가 크다. 11월 해 질 무렵 목요 시장이 파할 때쯤 그 길을 걷는다. 날이 쌀쌀하니 스카프를 둘러야 한다.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걸으면 좋겠다. 딸아이와 걸어도 좋겠다. 아직 약간 밉지만 남편도 오케이. 사람들이 장을 보고 상인들이 난전을 파하는 사이로 은행잎이 떨어지면 천국 같다. 은행잎을 생각하면서 노오란 가을에 빠진다.


 가을 여행도 다녀왔다. 책방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사전 답사 여행이었다. 우리는 아침 6시 30분에 청도에서 통영으로 출발했다. 길은 아름답고 음악은 멋졌다. 남편도 없고 아이도 없으니 자유부인이다. 우리는 여행을 즐겼다. 통영의 10월 1일은 한여름을 돌려주는 것 같았다. 남쪽의 시월은 더 찬란한 것일까... 하늘은 높았고 바다는 고왔다. 박경리 미술관 뒤 쪽 야트막한 언덕에는 코스모스가 만발해있었다. 전혁림 미술관의 그림은 색들이 살아있었다. 예전 아이들과 왔을 때는 저녁에 애들은 무얼 먹일까 이런 생각을 한 것 같다. 혼자 온 나는 그림 하나하나에 마음을 다 보낼 수 있었다.

 봄날의 책방은 오래된 폐가를 개조한 곳이었다. 맞은편 길에서 보면 커다란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책방은 비현실적일 만큼 몽환적이었다. 책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에너지 때문일까? 책방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그 집 마당의 황금회화나무 같았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그 나무는 '여기는 남쪽이야.'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통영의 시월에는 가는 곳마다 금목서가 오렌지빛 열매를 달고 서있었다. 박경리 기념관에도 있었고 주택의 정원수로도 있었다. 그것은 잊지 못할 향기를 내뿜었다.


 '어서 와, 이런 향은 처음이지...'


 윤이상 음악당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오보에와 그랜드 피아노는 무대를 꽉 채우고 우리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 주었다. 오보에 소리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듣기 좋은 계곡 물소리처럼 귀에 와닿았고 피아노는 통통거리는 새소리를 내었다. 몸집이 좋고 아랫배가 조금 나온 오보에 연주자와 안경을 낀 학자 같은 피아니스트는 행복해 보였다. 그들의 연주를 유럽이 아닌 통영에서 듣는 우리도 행복했다.

 더 할 수 없이 행복했다. 구름 위를 나는 기분이 이런 걸까... 그렇지만 인생은 언제나 그렇듯 숙제를 준다. 우주는 공평하지.


 일요일 오후에 수영장에 갔다. 많이 놀고 많이 먹어서 발에 힘이 풀렸다. 평영 발차기가 헛돌았다. 30분쯤 수영하고 사우나를 하니 몸이 조금 풀렸다. 샤워를 하고 수영복 탈수를 하려고 탈수기 앞에 섰다. 다른 이가 넣어놓은 수영복이 탈수되고 있었다. 기다리기 지루했다. 작은 바가지에 수영복과 수모와 비닐 백을 담아놓고 사우나실에 갔다. 사우나를 오래 하지는 못한다. 5분 정도 한 것 같다. 나와서 탈수를 하려고 바가지를 들었다. 아무리 뒤집어 보아도 수모가 없다. 헉... 놀란다. 혹시 흘렸나 하고 샤워실 바닥과 선반을 훑어본다. 없다!!! 손을 탄 게 분명하다. 이게 뭐야... 그날은 사람이 많이 없었다. 샤워하던 사람들을 째려본다. 아니지... 아니야... 기분이 묘해진다. 지난 6개월 동안 수모 1개, 샤워타월 1개를 잃어버렸다. 내 실수로 흘린 줄 알았다. 지금 정황으로 봐서는 그것도 누가 손을 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찬란하던 마음은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생각은 사방팔방으로 새로운 길을 낸다. 이런 썩을, 누구야, 미쳤나, 이런 걸 왜 갔고 가나! 샤워용품이 없어진다고 경고문이 붙어있더구먼 이유가 있었네,  뭐 하는 인간이야, 이게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왜 이러냐... 순식간에 나는 화의 불길에 사로잡혔다. 그 생각은 계속 꼬리를 물고 물었다. 누군지를 모를 그녀를 난도질했다. 미친 ㄴㄴ구나... 썩을... 할 일이 없어서... 도벽이구먼... CCTV 없는 곳을 찾구먼.. 자전거를 1년 정도 탔다. 아무 사고 없어서 우리나라 살기 좋은 나라라고, 카페에서 휴대폰도 노트북도 없어지지 않는 좋은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뭐냐고... 나는 분노란 분노는 모조리 꺼내고 정의란 정의는 모두 가져와서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때 나는 지구를 지키는 독수리 오형제라도 된 것 같았다. 다음 날 이마트에 수모를 사러 가면서 다시 분통이 터졌다. 욕을 해댔다. 손가락이나 부러져라... 썩을 ㄴㄴ.... 할 짓이 그렇게 없냐.... 남편이 좀 그만하라고 해도 성질을 다 쏟아냈다.


 그런데,

 왜 이러고 있지라는 생각이 든 건 화요일 오전이었다. 블로그를 열어보니,,, 블로그 챌린지를 놓쳤다. 9월 넷째 주 기록을 하지 못한 것이다. 일요일까지 써야 했었다. 욕질한다고, 할 일을 못했닷!

 내가 더 미친 ㄴㄴ같다는 생각이 훅 지나갔다. '미쳤구나,,,'와 동시에 괴로움이 몰려왔다. 미친 ㄴㄴ처럼 널을 뛰는 성질이 틈이 보이니 얼씨구나 하고 왔다가 갔구나. 태풍이 지나간 것처럼 머릿속은 초토화되었다. 마음도 끈덕끈덕했다. 인터넷으로 도벽을 찾아본다. 글이 좀 있었다. 조절되지 않는 충동조절장애라고 한다. 약물과 심리 상담을 받으라는 조언도 있다.

 블로그 챌린지도 해야 했고 여행 기록도 써야 했는데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시간과 에너지를 총동원해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하늘을 날던 마음은 갑자기 지하세계로 뚝 떨어진다. 눅눅하고 찜찜하고 어둡다. 눈물이 났다. 너는 더럽고 나는 깨끗하다고 난리를 치는 모습이 지나간다. 불타오르는 공격성에 놀란다. 그녀의 손가락에 위해를 가하고 싶은 마음에 놀란다. 이런 것들은 어디서 튀어나오는 걸까...  손가락이나 부러져라고 악다구니를 하던 내 안의 나는 무슨 충동조절장애일까. 도덕의 칼을 휘두르는 염라대왕이라도 되는가.



 어릴 적에, 초등학교 6학년 때였을 것 같다. 고모가 미국에서 한 달 공부를 하고 자동 연필깎이랑 탁구공보다 작은 탱탱볼을 하나 사다 주었다. 지금이야 흔한 물건이지만 40년 전 미국에서 온 그것들은 귀한 것이었다. 친구들을 집에 불러다가 같이 신나게 놀았다. 아마 엄청 으쓰댔을거다. 그리고 얼마 뒤 그 공이 없어진 것을 알았다. 그때도 나는 물건을 잘 흘리고 다녔다. 친구들한테 '그거 잃어버렸어.. 흐엉' 말하고 엄마한테 혼이 좀 나기도 한 것 같다. 한참 뒤 다 같이 한 친구 집에 가서 놀았다. 친구가 서랍에서 뭘 꺼내라고 말해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서랍을 열었는데 없어졌던 그 공이 서랍 안에 있었다! 한 친구가 조용히 그 공을 꺼내서 내게 건네주었고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년 전에 지금 동네로 이사 왔다. 길에서 우연히 그 친구와 마주쳤다. 나는 왠지 그 친구가 반갑지 않았고 불편했다. 이제 알겠다. 오랫동안 그녀에게 도둑이라고 말하고 있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던 거다.


 오늘은 수요일. 아침에 명상을 하고 달리기를 하고 길고 긴 낮잠을 잤다. 자는 사이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부끄러운 마음도 조금 작아졌다. 책방에 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녹았다. 카톡에는 여행팀이 긴 회의를 하고 있었고, 선생님들은 각자의 일을 해내고 있었다.


 그 시간에 잠을 자고 있었다.  

 길고 질척한 낮잠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나왔다. 나는 그 사이사이를 헤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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