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치트키를 얻다
요즘 내 인생을 한 줄로 정리하라면 이렇다.
땅. 짚. 고. 헤. 엄. 치. 기.
편의점 야간 알바를 하면서 5년째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때에는 하루하루가 늪 같았는데,
이제는 아침마다 신이 미리 적어준 '오늘의 공략집'을 받아보는 기분이다.
‘사각.’
문 앞에서 익숙한 소리가 났다.
“왔구나.”
알람 보다 이 소리가 더 먼저 들린다.
문을 열어 신문을 집어 들고, 바로 경제면부터 펼쳤다.
<○○고속, 반포 고속 터미널 재개발 발표에 상한가 직행>
자리에 앉기 전에 주식 앱을 켰다.
다음날 상한가를 기록할 종목들을 체크하고 미리 매수 주문을 넣는다.
매수와 동시에 상한가에 예약 매도 주문을 걸어 놓으면 내일 장중에 자동으로 체결될 것이다.
당연히 얻게 될 수익도 미리 계산된다.
‘내일 수익, 281만 3천 원.’
인스턴트 봉지 커피로 탄 커피를 한 모금을 마시며 화면을 내려다봤다.
“와.. 편의점 알바 두 달 치를, 진짜..”
여전히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내가 갑자기 천재가 된 것도, 전설적인 투자 감각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냥, 내일 신문이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이다.
돈이 생기니, 자연스레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편의점 사장님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한 며칠 전.
“사장님. 저 이제 알바 그만하려고요.”
“어? 왜? 시험 접었냐?”
“네. 이제.. 다른 거 해보려고요. 그동안 많이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성공하면 찾아뵐게요”
사장님이 잠깐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야, 네가 그런 말을 다 하네. 밥은 내가 살 테니 꼭 취업 성공해라."
“조만간 진짜로 밥 사러 올게요.”
예전의 나라면 “아, 네.. 언젠가요..” 하며 얼버무렸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앞으로 잘될 사람이다.’
스스로 그렇게 믿는 순간, 입에서 나오는 말과 태도도 자연스럽게 달라졌다.
며칠 뒤엔 진짜로 편의점에 치킨과 캔맥주를 들고 갔다.
“사장님, 오늘 집에 가시면 형수님이랑 같이 한 잔 하세요.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야, 너 진짜 이상해졌다. 너 취업은 조금 늦어도 앞으로 잘 될 거 같다야!”
사장님이 껄껄 웃었다. 나도 같이 웃었다.
이젠 최소한,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신문은 돈만 벌어다 주는 것만이 아니었다.
[내일 신문]은 경제면뿐만 아니라 사회면, 정치면 구석구석에도 쓸만한 정보가 줄줄이 적혀 있었다.
<출근 시간대 홍대입구역 환승 통로, 안전사고로 한 시간 넘게 통제, 시민 불만 폭주〉
나는 신문을 한 번 힐끗 보고, 간만에 보기로 한 고등학교 친구 놈들 단톡방에 톡을 남겼다.
[나]
내일 홍대 말고 신촌에서 보자. 홍대 지하철에 문제 생긴단다.
[친구]
뭔 소리야, 니가 지하철 설계했냐 ㅋㅋ
[나]
아. 믿을 만한 소식이니까 그냥 신촌에서 봐! 내가 쏠게!
[친구]
오. 그럼 신촌으로 가야지! 공짜면 양잿물도 마신다는데. ㅋㅋ
다음 날.
“야. 진짜로 홍대입구역 환승 통로 막혔대. 안전사고 났다네. 사람들 거기서 줄 서서 못 나오는 중이래.”
친구가 내 얼굴을 힐끗 쳐다봤다.
“.. 너, 진짜 뭐냐?
“그냥, 감이 좀 좋아졌어.”
어차피 진실을 말해도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리고 말해서도 안 되고.
다른 날에는 신문 하단의 작은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광화문 청계광장 낮 12시 브랜드 깜짝 이벤트. 현장 방문객 100명 한정 5만 원 상품권 기습 지급>
나는 시계를 보았다. 11시 15분.
“음..”
마침 근처에서 약속이 있었다.
[나]
우리 청계광장 앞에서 보자. 11시 50분쯤.
[친구 2]
거긴 또 왜. 거기 사람 바글바글해서 싫은데.
[나]
오늘은 좋아질 거임. 믿어.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광장 한쪽에서 마이크 테스트 소리가 들려왔다.
“자, 잠시 후 12시부터 깜짝 이벤트 진행합니다! 선착순 100분께 5만 원 모바일 상품권 드립니다!”
친구가 나를 본다.
“너, 설마 이거 알고 있었냐?”
“거봐, 좋은 일 있을 거라고 했지!”
잠시 후, 줄을 선 사람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물론 우리는 넉넉하게 100명 안에 들어갔고 당당하게 상품권을 챙겼다. 줄이 끊긴 뒤에 도착한 사람들은 투덜대며 돌아갔다.
“아, 좀만 일찍 올 걸!”
“이런 건 미리 공지하고 하지!”
상품권을 받은 뒤, 친구가 토끼 눈을 하고 말했다.
“야, 너 요즘 인생 좀 치트키 같다. 인정.”
나는 웃으며 주머니에 상품권을 집어넣었다.
사실, 이건 치트키가 아니라 스포일러에 더 가깝지만.
그 외에도, 나의 하루하루는 소소한 예측들로 빼곡했다.
밤에 있을 음주운전 단속 위치,
카카오톡이 잠깐 먹통 되는 시간대,
프로야구 경기의 역전 적시타,
폭우로 뉴스에 나올 개천 범람 동네 이름까지.
내 머릿속에는 이미 ‘오늘 벌어질 일들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세상은 점점 재방송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뭔가를 미리 알아맞히고, 아는 척 한 번씩 해보는 게 나는 꽤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사회면 한 귀퉁이.
다른 기사들과 달리 눈에 딱 걸리는 한 줄이 있었다.
<어제 오후 3시 40분경, 홍대 ○○카페 외벽 간판 추락, 행인 여성 1명 중태〉
나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혼잣말을 했다.
“굳이.. 안 가도 되는데.”
홍대까지 나가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냥 기사 한 줄로만 지나가도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가 있으면.. 이걸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실험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솔직히,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영웅심리에 마음이 간질거렸다.
“가보자.”
결국 나는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홍대 앞, ○○카페. 2층 간판을 자세히보니 분명 허술해 보였다.
나사 몇 개가 덜 조여진 것처럼 모서리 부분이 조금 삐딱했다.
'저게 어디로 어떻게 떨어진다는 거지..'
3시 30분.
나는 일부러 카페 야외 테라스 쪽 자리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3시 35분.
간판 바로 아래 테이블에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여자가 자리를 잡았다.
‘와..’
어마어마한 미인이었다.
역시 나오길 잘했다고,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는 노트북을 열고, 이어폰을 꽂은 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바람이 조금 세게 불었다. 그녀 머리 위 간판이 아주 미세하게 ‘끼익’ 하고 흔들렸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섰다.
“저기요.”
그녀가 이어폰을 빼며 고개를 들었다.
“네?”
“여기 아무래도 위험한 거 같아요. 위에 간판이 계속 흔들거리더라고요. 자리를 옮기시는 게 좋겠어요."
그녀는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지만, 위를 한번 올려디보고는 이내 대답했다.
“아.. 정말 그러네요. 고맙습니다.”
그녀는 노트북과 컵을 들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가방을 들어 옮겨주었다.
그렇게 우리가 안쪽 테이블로 옮기고 나서 1분 정도 지났을까?
끼익—
콰앙~!!
방금 전까지 그녀가 앉아 있던 야외 테이블 위로 커다란 간판이 와장창 떨어졌다.
테이블도 의자도 산산이 부서졌다.
“으악!”
“뭐야 저거!”
카페 직원들이 허둥지둥 뛰어나왔다.
“괜찮으세요?! 방금 여기 앉아 계신 분 계셨는데.”
여자는 멍하니 그 자리를 내려다보더니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저.. 방금까지 저기 있었죠?”
“네. 조금만 더 앉아 계셨으면 지금 머리 위에 저 간판이 있었을 거예요.”
그제야 그녀 얼굴에 늦게 온 공포가 번졌다.
“헐.. 진짜 큰일 날 뻔했네..”
직원이 연신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비 오고 바람 불 때 점검했어야 했는데.. 손님들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나는 팔을 한 번 툭툭 치며 말했다.
“전 괜찮습니다. 이분도 다친 데는 없으신 것 같고요.”
여자가 나를 한 번 더 뚫어지게 쳐다봤다.
“.. 근데, 어떻게 알았어요?”
“뭐가요?”
“여기 위험할 것 같다고.. 안쪽 자리로 옮기자고 하셨잖아요.”
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간판이 좀 삐딱해 보였다고..
음.. 사실은 제가 그쪽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발견한 거긴 해요. 하하"
와우~ 평소에는 여자 앞에서 얼음처럼 굳던 내가 이런 너스레라니. 그것도 이런 미인에게!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저 안 바라봐주셨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그리고 핸드폰을 꺼냈다.
“연락처 좀 주실 수 있어요? 이런 건 그냥 ‘감사합니다’로 끝내기엔 좀 그렇네요.”
뭐야 이거. 잘 되는 분위기잖아?!
우리는 서로 번호를 주고받았다.
“정민이예요. 저는.”
“아, 네. 저는 지환이고요.”
카페를 나와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길,
나는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주식으로 돈도 벌고, 지하철 헬도 피하고, 길거리 이벤트로 상품권도 먹고, 이젠 사람까지 구했다.
게다가 어여쁜 그녀와 썸을 탈 수 있는 기회까지!
이거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는 인생이 아닌가.
그날 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확인했다.
정민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정민]
오늘 진짜 감사했어요.
간판 생각하면 아직도 좀 쎄하네요.
조만간 밥 꼭 살게요 :)
나는 화면을 보고 피식 웃었다.
‘내일 신문으로 돈도 벌고, 사람도 살리고, 인연도 만들고..’
생각하면 할수록 이 능력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모든 건 현실이었다.
통장에 찍힌 숫자들, 오늘 있었던 사고 기사들, 그리고 방금 도착한 메시지.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 저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종이 다발이라는 게 소름이 돋을 만큼 신기했다.
나는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내일은.. 또 뭐가 적혀 있을까.”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신문을 기다렸다. 그런데.
늘 ‘사각’ 소리가 나던 아홉 시가 지나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9시 3분.
9시 7분.
9시 12분.
“어..?”
괜히 문을 열고 복도를 살펴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편함도 열어봤다. 전단지만 잔뜩 꽂혀 있을 뿐이다.
문을 닫고 다시 들어왔다. 그때.
‘사각.’
그제야, 문 앞에서 익숙한 소리가 났다.
나는 재빨리 문을 열었다.
평소처럼 신문 한 부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딱 하나 다른 점이 있었다.
신문 모서리 한쪽이 살짝 구겨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한참 쥐고 있다가 다시 내려놓은 것처럼.
굵은 글씨로 적힌 네 글자. [내일 신문]
오늘따라 그 ‘내일’이라는 단어에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