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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인도 좀 다녀오겠습니다

by 채PD

"어디로 가려고?"


"인도"


나의 첫 해외여행지는 그렇게 결정됐다.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서른이 되도록 해외 한 번 못 나간 게 마음에 걸렸고, 예산과 가성비를 따지다 보니 남은 곳이 인도뿐이었다.

미국, 유럽은 비싸고, 일본·중국은 너무 가깝고, 동남아는 지나치게 휴양지 느낌이라 여행 같지가 않았다.


"일단 떠나자. 이러다 여기 지박령 되겠다"


그렇게 인도로 향했다.




프리랜서 외주 PD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시간의 자유’다.

내가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고, 프로그램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골라서 할 수 있다.

물론 내가 하고 싶다고 다 시켜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하기 싫은 프로그램을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


PD 5년 차까지, 나는 한 프로그램을 6개월 이상 해본 적이 없었다.

위클리 프로그램은 반년이면 누구라도 제작 전반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먹고 자는 시간 빼고 반년을 프로그램에 바치면 누구라도 그 메커니즘을 깨우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반 년정도가 지나면 알아서 다른 프로그램을 찾아 떠났다.


여행, 정보, 스튜디오, 다큐멘터리까지.

제법 여러 프로그램을 경험한 나는 이제는 잠시 휴식이 필요하다고 스스로 진단을 내렸다.


“딱 한 달 반만 쉬자. 충분히 굴렀다.”


프리랜서라서 가능한 일정이었다.

방송국 정규직 PD라면 한 달간 휴가라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인도 여행은 길게 가는 게 좋다는 후기가 많았다.

델리, 바라나시, 아그라 정도만 돌아도 최소 5일. 하지만 그 정도로는 “인도를 보고 왔다”라고 할 수 없다는 게 정설이었다. 인도를 먼저 다녀온 이들의 부심은 꽤나 뿜뿜했다.


"최소 3개월은 가야 인도여행 했다고 할 수 있지"

"과거로 가는 여행이죠,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고행의 길"

"호불호가 극명한 곳. 모험을 좋아한다면 고우"


모험 좋지. 휴양은 나중에 나이 먹고 가자.

어떻게든 200만 원 정도를 마련했고, 인도 한 달 + 태국 일주일이라는 여행 계획을 세웠다. 숙소도 미리 잡지 않았다.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뭐~'라는 순진한 모험가의 마음으로.

비행기 안에서야 ‘인도 100배 즐기기’를 펼치고 어디로 갈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정말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떠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렇게 용감, 아니 무모할 수 있었을까?


돌아와야 할 일정도 없었다. 돌아오면 일거리는 언제든 잡을 수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5년 차 PD였으니까.


돌이켜보면 그렇게 마음 편한 여행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바라나시에서 우연히 만난 여행자들과 즉석으로 팀을 꾸려 계획에도 없던 외딴섬으로 향했고, 어설픈 영어로 현지인과 종교와 사후 세계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다. 한정된 단어 몇 개로도 그토록 깊은 대화가 가능하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바닷가 해변에 누워 커다란 해가 바다로 빨려 들어가듯 가라앉는 석양을 바라보던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그때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후배들에게 말한다.

젊을 때 프리랜서 PD라는 특권을 마음껏 누리라고.

여행에서 돌아온 뒤 나 역시 인도 예찬론자가 되어 있었다.
내 얘기를 듣고 두 명의 후배 PD가 인도로 떠났으니, 뭐 말 다 했지.


지금은 그때처럼 혼자 훌쩍 떠날 수는 없다.
이젠 집 앞에 잠깐 나가려 해도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래도.. 지금이 더 행복하다. 진짜루. (아.. 근데 왜 눈물이 나지..허헙)


나는 가끔 생각한다.
그때의 그 자유가 있었기에 지금의 나도 버틸 힘이 생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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