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PD는 직업빨이 있어

네모난 오이를 찾아서

by 채PD

오늘 촬영 아이템은 ‘네모난 오이’.

오이가 어떻게 네모란 말인가! 말만 들어도 재미있지 않은가!


'정말 네모난 오이가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만드는지, 왜 굳이 네모를 고집하는지.'
그 모든 궁금증을 카메라에 담아 오는 것이 오늘 내 임무였다.

목적지는 경남 거창. 아~ 멀다.


새벽 동트기 전, 졸린 눈을 비비며 출발한 지 어느덧 세 시간이 넘었다.
조수석엔 6mm 촬영 카메라가 얌전히 누워 있다. 와이어리스 마이크와 테이프도 넉넉히 챙겼다.
운전은? 당연히 내가 한다.

운전기사나 카메라 감독은 언감생심이다. 외주 프로덕션은 인력도, 경비도, 시간도 항상 부족하다.

일당백. 혼자 찍고 혼자 편집한다.


내가 새끼 PD일 때 맡았던 프로그램은 MBC ‘공감 특별한 세상’.
전국 곳곳의 특이한 사람들, 기이한 사건, 맛집, 생활정보를 다루는 바로 그 장르.

VJ특공대, 무한지대Q, 생생 정보통, 세상에 이런 일이..

TV만 틀면 쏟아져 나오는 ‘위클리 교양’의 세계다.

이렇게 매주 방송하는 프로그램들은 아이템 경쟁이 살벌하다. 재미있는 아이템이 뜨면 바로 내려가서 찍고,

2~3일 뒤 방송을 내보내기도 한다.

정말로, '번갯불에 콩 튀겨먹는' 제작 방식이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네모난 오이’ 역시 급하게 잡힌 아이템이었다. 일단 내려가 본다.


거창.

마을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산속 깊숙했단 건 확실하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타고 올라가다가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한 문구가 시야를 강타했다.

그것은 커다란 고목도, 장승도 아니었다.


[환영! MBC @@@ PD님! 공감 특별한 세상 촬영!!]


헐. 마을 입구 한가운데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아유~ 이장님, 이건 좀 과하잖아요. 현수막이라니요.”

“아이고, 우리 마을 홍보해 주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잘 좀 찍어줘잉!”


지금은 몰라도 십 수년 전 방송 PD는 제법 인기와 위상(?)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냥 ‘PD’라는 말에 호감 어린 눈빛을 보냈다.

뉴스이던, 교양이든, 예능이든, 어떤 형식이든 방송은 긍정적인 면을 담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자기 마을을 방송에 소개해주는 사람이니 얼마나 고맙겠는가?

고발 프로그램만 아니라면 누구든 PD를 미워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늘 등장하던 단골 멘트도 빠지지 않는다.


“근디 담당 PD가 아주 젊네? 결혼했어?”

“김할매네 손녀사위로 삼으면 딱이겠구먼~”


촬영을 하다 보면 어머님들이나 할머님들이 사위 삼고 싶다는 말은 정말 거의 매번 듣는다.

이건 뭐 나만 듣는 줄 알았는데, 후에 알고 보니 앵간한 젊은 PD들은 모두 듣는 단골 멘트였다는.


“그런데요.. 네모난 오이는 어디 있나요?”


“아, 따라와봐라잉.”


이장님을 따라간 작업장에는 탑차에 실리고 있는 오이 박스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박스 안의 오이들은 원통이 아니라, 길쭉한 정사각형이었다.


“어떻게 오이가 이렇게 네모나요?”


“별거 아녀. 오이가 새끼손가락만 할 때 네모난 캡을 씌워 놓으면 그 모양 그대로 자라는 기다.”


“오호—!
그럼 왜 네모로 만들 생각을 하신 거예요?”


“특산품 하나 만들어보려꼬. 우리 마을 시그니처지.”


“다른 특징도 있나요? 맛이 더 있거나 오래 보관되거나..”


“네모나니까 상자에 더 많이 들어가.”


“아하.”


“팔리기는 잘 팔려요?”

“그건 모르겄어. 아직 사람들이 잘 몰라. 그러니 PD가 홍보 좀 잘 해줘잉!”


“네. 열심히 찍어가겠습니다!”


마을의 네모난 오이를 샅샅이 찍고 이장님의 클로징 인터뷰까지 마무리.

이제 서울로 돌아가려는데.

그럴 리가 없다.

마을 사람들은 절대 PD를 그냥 보내지 않는다.


마을회관에선 이미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커다란 멧돼지가 장작불 위에서 통째로 빙글빙글 구워지고 있었다.

물론 내가 와서 열린 파티였지. 어쩐지 고기 냄새가 솔솔 나더라니.


“와~ 이 장면도 찍어야겠는데요? 멧돼지 바비큐 너무 멋지네요.”

“흠흠.. 그건 찍지 마."


"왜요?"


"그건 묻지 말고..”


대충 감이 왔다. 멧돼지 포획 과정이 그리 합법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머 어떠랴, 상관없다.

오늘 나는 네모난 오이만 찍어가면 되는 거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림은 다 담았으니까 잘 먹고 갈게요~"


멧돼지를 배 터지게 먹고 나서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떠나려 하니 또 어르신들이 옥수수, 사과, 포도, 그리고 네모난 오이까지 한가득 챙겨주신다.

차 트렁크가 농산물로 가득 찼다.


"아이고. 어르신. 이런 거 안 챙겨주셔도 됩니다. 마음만 받을게요"


"어허, 마을 손님을 어떻게 빈 손으로 보내나? 잔소리 말고 어여 출발혀~"


이장님과 한동안 옥신각신 끝에 결국 90도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출발한다. 마을 주민들은 입구까지 배웅을 해주셨고 한참 동안 손을 흔들어 주신 분도 계셨다.

차를 몰고 나오며,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PD는 참 환영받는 직업이야..”


지금은 시골에 가도 이런 환영 현수막도, 즉석 잔치도 볼 수 없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방송은 많아졌고 PD는 더 많아졌다.


내가 일하는 마포구 상암동은 대한민국의 방송사들이 모두 모여 있는 미디어 시티다.
여기 길바닥에서 “피디님!” 하고 부르면 적어도 30명은 뒤돌아볼 것이다.

그만큼 PD가 많아졌다. 매체도, 플랫폼도, 제작사도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니까.

당연히 ‘PD의 인기’도 옛날 같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PD에게 호감을 갖는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를 세상에 전해주는 사람이니까.


현수막도 없어졌고, 마을 잔치도 사라졌지만,

그 마음만큼은 남아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PD는 직업빨이 있어"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06화굴뚝 위의 신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