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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 위의 신입

방송국 PD? 외주 PD?

by 채PD

둥그렇고 길쭉한 굴뚝이 하늘로 쭉 뻗어 있었다.

밑에서 올려보니 얼추 20미터는 넘어 보인다.


나는 사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손바닥은 이미 땀으로 번들거리고,

한여름의 태양이 달궈놓은 철제 사다리는 손이 데일만큼 뜨거웠다. 하지만 그건 별 문제가 아니었다.


떨어지면, 죽는다.

그게 문제였다.


내 등에는 ENG 카메라용 커다란 트라이포드가 매달려 있었다.

무게 중심을 앞쪽으로 당겨야 겨우 균형이 잡힌다.


'여기서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뭘 어떻게 돼, 뒤지는 거지.'

젠장~ 그런 생각은 집어치우고 앞사람 발끝만 보고 가자, 아니 윗사람 발끝이구나.

게다가 위에 먼저 오르고 있는 사람은 담당 PD님과 카메라 감독님이 아닌가. 제일 졸병인 내가 뒤처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땀을 한 바가지 쏟고 나서야 겨우겨우 정상(?)에 올라섰다.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광활한 공장 전체가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이 한 컷을 담기 위해서 조금 과장해서 목숨을 걸고 여기를 올라온 것이다.


“와~ 올라오니까 그림은 죽이네요.”


“고생했다. 그런데 이걸 어쩌냐?”


“뭐요?”


“테이프를 안 가져온 것 같아.”


"...네?


귀를 의심했다.

아니! 카메라 감독이 촬영 테이프를 안 가져왔다니, 이건 군인이 전쟁터에 총알을 놓고 나갔다는 이야기잖아! “당신 제정신이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럼 제가 저 밑에를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야 하는 건가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물었다.


“음.. 남은 테이프가 한 5분은 될 거 같아.”


“감독님은 NG 없이 OK컷만 내시는 분이잖아요! 믿습니다!!”


“그래, 알았다. 해볼게.”


다행히도, 그날 공장 부감 촬영은 단 한 번에 성공했다.
만약 나보고 다시 내려갔다 올라오라 했더라면, 나는 그 자리에서 사직서를 썼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날이 내 생애 첫 촬영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드론 한 대면 손쉽게 하늘에서 ‘부감 샷’을 담을 수 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그런 건 없었다.

높은 산이나 건물을 직접 올라야 했다. 굴뚝이 바로 우리의 드론이었다.


“선배님, 원래 촬영이 이렇게 빡세요?”

포항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 운전대를 잡은 카메라 감독님께 물었다.


“편하게 찍고 싶으면 방송국 가야지.”


단호했다. 그리고 정확했다.

그 시절, 모든 PD가 같은 조건에서 일하는 건 아니었다.
외주 프로덕션은 늘 인력도, 장비도 부족했다. 지상파라면 카메라 보조, 운전기사, 배차 차량까지 완비됐겠만 우린 오직 셋이서 모든 걸 해냈다.


방송 PD의 길은 두 가지였다.
공채에 합격해 방송국에 들어가거나, 외주 PD가 되어 현장을 떠돌거나.


나는 후자였다.

공채 시험엔 번번이 떨어졌지만, 방송을 만드는 일 자체가 너무 즐거웠다.

수입은 적었고, 수면 시간도 적었지만, 나에게 현장은 늘 생생했다.
그래서 별다른 고민 없이 외주 PD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렇게 20년이 훌쩍 지났다.




이제 조연출이 높은 굴뚝을 오를 일은 없다.
드론이 대신 올라가 준다.
대당 수천만 원씩 하는 거대한 편집 데크도 사라졌다. 노트북 한 대면 처음부터 끝까지 편집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이제는 ‘어디 소속이냐’보다 ‘무엇을 만드느냐’가 중요해졌다.
MBC PD가 넷플릭스 시리즈를 만들고, 유튜버가 다큐를 만든다.
콘텐츠의 시대는 그렇게 도착했다.


기술의 발전은 방송국의 권력에서 콘텐츠의 권력으로 무게추를 옮겨놓았다.
덕분에 시청자는 더 다양한 이야기를 즐기게 되었고, 우리 제작자들은 더욱 긴장하게 되었다.


약 스무 해 전,
트라이포드를 짊어지고 굴뚝을 오르던 그날의 나를 떠올린다.

그땐 그저 ‘높은 곳에서 찍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굴뚝 위에서 본 풍경은 그저 한 장면이 아니라 앞으로 달라질 세상의 예고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굴뚝에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

세상이 바뀌었다.

이제는 몸이 아니라 ‘만듦새’가 더 높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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