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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도 전공이 있다

다큐냐 예능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by 채PD

PD도 전공이 있다

"너 다큐만 할 거야?”


편집실에서 선배 PD가 내게 물었다.


“교양은 교양대로, 예능은 예능대로. 드라마는 드라마대로 전부 완전히 다른 세계야. PD도 결국 전공이 있어.”


그땐 몰랐다. PD에게도 ‘과’가 있다는 걸.


의사들은 각자 전공이 있다. 외과, 내과, 성형, 피부, 산부인과처럼 말이다.

물론 자신의 전공이 아니더라도 진단과 치료는 가능하다.

피부과 의사라고 하더라도 응급 상황에는 팔다리가 부러진 환자를 수술하고 깁스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하지만 정형외과 의사만큼 완벽하긴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늘 전문의를 찾는다.


PD들도 마찬가지.

피디에게도 ‘전공’이 있다. 크게는 교양, 예능, 드라마로 나뉜다.


교양 PD는 세상을 탐구하고, 예능 PD는 사람을 웃기고, 드라마 PD는 감정을 연출한다.

한 방송국 안에서도 이 셋은 거의 다른 언어를 쓴다.

교양 PD가 “이 장면의 의미는..”이라 말할 때, 예능 PD는 “여기서 빵 터져야지!”를 외친다.


물론 요즘은 이런 구분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예전엔 ‘시사교양국’과 ‘예능제작국’이 칼같이 나뉘었지만 이제는 ‘제작국’으로 통합된 곳이 많다.

프로그램들이 복합장르로 진화하고 있고, 피디들 또한 장르를 넘나들며 전천후로 일한다.


넷플릭스의 히트작 [피지컬 100]을 만든 장호기 PD는 한때 MBC PD수첩을 연출하던 시사 PD였다.

그 이전엔 채널에이에서 먹거리 X파일을 만들기도 했다.

시사보도, 탐사취재, 스튜디오 서바이벌 예능까지, 완전히 다른 전공을 오가며 일한 셈이다.

하지만 결국 하는 일은 같다.


이야기를 만드는 일.


어쨌든.


다큐멘터리 제작 조연출로 PD 생활을 시작한 나.

일을 배우면서 전공도 결정해야 하는 시기였다.


"뮤직뱅크에 FD 필요하단다, 가서 도와주고 와!"


방송국의 장점은 다양한 장르를 직접 경험할 수 있다는 것.

가끔 다른 부서로 지원을 나가면 세상이 달라 보였다.


음악 방송 무대는 축제였다.

화려한 조명, 귀가 먹먹한 스피커 소리, 땀 냄새, 그리고 시간과의 전쟁.

리허설 중 PD의 “큐!” 한 마디에 가수와 스태프 수십 명이 동시에 움직였다.


아침 생방송은 전혀 다른 시간의 흐름을 경험할 수 있다.

초 단위로 시간을 체크하면서 방송의 시작과 끝을 맞춰야 한다.

수십 대의 모니터를 지켜보며 커팅을 넘기는 PD의 손놀림은 누가 봐도 멋져 보였다.

특히, 방송이 끝나는 엔딩스크롤이 나가자마자 모든 스태프가 동시에 우르르 일어나면서 "밥 먹으러 가자!"하고 외치던 모습은 대단히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생방송은 끝나면 정말로 끝나는 매력이 있다.


나의 동기들은 각자 원하는 전공을 찾아가고 있었다.


“나는 예능 하고 싶어, 연예인이랑 일하고 싶네. “


“나는 다 필요 없어, 방송국에서 촬영하고 편집만 할 수 있다면 교양이든 예능이든 뭐든 다 좋아”


나는 말했다.

“난 다큐야. 폼 나잖아~”


나는 뭔가 있어 보이는 다큐멘터리가 마음에 들었다.

느리지만 진지하고, 묵직했다. 확실하게 배워가는 것이 있다는 점도 좋았다.


다큐멘터리의 가장 큰 특징은 시간이다.

짧게는 3~4개월, 길게는 1년 이상 취재와 촬영이 이어진다.

그동안 PD는 사람을 만나고, 책을 읽고, 현장을 밟는다.

‘뭘 알아야 만든다’는 말이 정말 맞다.


무엇보다 다큐 PD는 글을 쓴다.

교양은 작가의 비중이 크지만, 다큐는 피디가 직접 구성안과 내레이션 원고를 쓰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훨씬 많다. 반면 예능 작가는 원고 대신 출연자 섭외와 상황 설계에 집중한다.

한마디로 예능은 현장에서 쓰고, 다큐는 책상에서 쓴다.


내가 있던 KBS 다큐팀엔 약 20명의 피디가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의 모든 피디가 직접 원고를 썼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언젠가 나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품은 게.


"글을 쓸 줄 모르는 PD는 반쪽짜리야"


당시 한 선배가 내게 한 말이다.


피디에게 필요한 역량은 많다. 기획력, 연출력, 리더십, 섭외력..

하지만 결국 가장 필요한 것은 구성력이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이야기를 엮는 힘만큼은 기술로 대체할 수 없다.


카메라나 편집기는 누구나 다룰 수 있지만,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건 아무나 할 수없다.

이야기를 엮는 힘은 내공으로만 생긴다.


내가 다큐 PD에 끌렸던 이유도 그거였던 것 같다.

기술보다 사람, 속도보다 이야기.


어쩌다 보니 프로그램에서 내가 직접 글을 쓸 기회는 많지 않았다.

뒤늦게 20년이 지나 이제야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끄적끄적 써보고 있다.


조금 늦은 걸까?

그럴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믿는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늦게 피어도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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