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집어치워, 도제식으로 배우는 방송 현장
“너는 왜 뽑힌 거야?”
입사 초기에 선배들이 내게 자주 했던 말이다.
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복수 전공했고, 학점도 나쁘지 않았지만 실무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책으로 배운 건 시험용 이론이었을 뿐, 방송 현장은 말 그대로 몸으로 익히는 세계였다.
“이건 뻥튀기예요.”
“네?”
“촬영 끝난 테이프를 넣고 버튼을 누르면 안에 자석이 돌아가요.
영상이 싹 지워지죠.
그렇게 포맷된 테이프를 다음 촬영 때 다시 쓰는 거예요.”
“아. 네.."
2년 선배가 촬영 테이프를 재활용하는 회색 철제 기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때 옆에서 의자에 거의 눕다시피 한 채로 무심하게 편집을 하고 있던 또 다른 선배가 툭 내뱉었다.
”야. 뻥튀기가 뭐야. 뻥튀기가! 가르칠 땐 제대로 가르쳐 줘!"
“저도 뻥튀기라고 배웠는데요.”
“...”
그렇다. 나의 직속 선배도 그 기계의 정식 명칭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후에 나는 그 기계의 이름이 ‘이레이저 (Eraser)‘라는 것을 다른 선배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그게 정확한 명칭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지금은 디지털 메모리로 촬영하는 시대라, 그 기계는 이미 현장의 화석이 되어버렸으니까.
그런데 뻥튀기만 그런 게 아니었다.
방송 현장은 선배에게서 직접 배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곳이었다.
촬영이나 편집은 두말할 것도 없고, 특히 현장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은 뻥튀기처럼 누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도무지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먹을 수가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무엇보다 일제 강점기의 잔재인지 모르겠으나 방송 현장에는 일본 말이 너무나 많이 쓰이고 있었다.
예를 들면,
야마 (주제, 핵심) / 이 프로그램의 야마가 뭐야?
시바이 (연출, 설정) / 시바이가 너무 밋밋한데?
데마이 (화면에 사물의 일부를 살짝 걸치게 나오도록 촬영하는 기법) / 데마이 걸고 찍자.
하레 (빛이 많이 들어온 상태) / 하레 들어오니까 뭐로 좀 가려봐.
나까 (우스꽝스러운, 예능스러운) / 너무 나까 같은데?
데모찌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따라가면서 촬영하는 기법) / 트라이 빼고 데모찌로 찍어.
니주 (호기심이라는 뜻, 원래는 무대의 마룻바닥을 까는 널빤지를 뜻하는데, 방송에서는 '어떤 상황의 호기심을 주도록 하는 장치'라는 말로 쓰인다. 흔히들 '니주를 깐다'라고 함) / 앞에 니주 좀 더 깔아~
아.. 이것 말고도 너무너무 많다.
오도시, 시마이, 바래, 나래비, 와꾸, 아다마 등.. 처음엔 무슨 암호인 줄 알았다.
과거에 비해서 점차 일본어 사용은 사라지고 있는 추세지만 그래도 여전히 현장에서는 아무런 저항 없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비단 용어뿐만 아니라 촬영 기법, 편집 방법, 섭외하고 인터뷰하는 요령 등.
실무에서 배워야 하는 것들은 말 그대로 오로지 선배들에게서만 배울 수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몰라도 너무 몰랐다.
다른 신입들은 그래도 졸업작품 한두 개 정도는 만들어 본 경험이 있었는데, 나는 카메라를 만져본 적조차 없었다. 당연히 편집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는 이론만 배웠다, 그것도 복수 전공으로.)
편집기도 회사 와서 처음 봤으니 말 다했지.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 모든 게 어렵다기보다는 너무나 신기했다.
커다란 ENG 카메라, 수천만 원짜리 편집기, 스튜디오와 더빙실. 등.
그 모든 공간이 내겐 놀이터 같았다.
나는 직장인이 아니라, 방송국에 견학온 학생이 된 기분으로 배우며 일했다.
문제는 나를 가르치는 선배들이었다.
“너는 왜 뽑힌 거야?”
그 말엔 짜증과 피곤, 그리고 약간의 연민이 섞여 있었다.
그래도 버텼다. 꾸역꾸역.
내가 처음 일한 곳은 지상파 프로그램이 아닌 기업의 사내방송이나 홍보 영상을 만드는 작은 프로덕션이었다.
그래서 늘 마음속엔 다짐이 있었다.
“여기서 배우고, 언젠가는 지상파 방송을 만들어야지!”
그렇게 1년반이 흘렀다.
어느 여름날, 혼자 6미리 카메라로 촬영부터 편집까지 마무리한 영상을 납품하고 돌아왔을 때
선배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야~ 이제 카메라맨 없이 한 꼭지 말아올 줄도 아네?”
그 말 한마디가 내게는 세상의 모든 칭찬 같았다.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이제 전국 방송 만들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