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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력서가 바뀌었다고요?

경력직만 뽑는 더러운 세상

by 채PD

"학창 시절에도 이력이 굉장히 화려하네요."


"네.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습니다."


"해외에서 촬영 경험도 많으시고요.."


"네? 전 아직 해외에 나가본 경험이 없는데요."


"..."


"이거 뭐야? 이력서가 왜 섞였지?"


면접실이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프린트된 지원자들의 서류가 뒤섞이면서, 누군가의 이력서 한 장이 내 이력서에 붙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아주 화려한 경력의 이력서가!


하... 이런 코미디 같은 일이 있나.

이게 어떻게 잡은 첫 실무 면접인데..


대학교 시절, 방송국 동아리에서 아나운서를 하며 “나는 PD가 될 거야”라고 다짐했었다.

아나운서임에도 PD가 되겠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그냥 PD가 가장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나운서는 물론이고 촬영, 기술 스태프들을 모두 좌지우지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았다. 방송국은 보통 가을쯤에 신입사원 채용공고를 냈었는데

서류전형부터 논술, 작문, 면접까지 채용 절차는 그야말로 산 너머 산이었다.

당연히 경쟁률은 수백 대 일을 가볍게 넘겼고, 나는 최종 면접까지는 가보지도 못하고 계속 미끄러졌다.


방송국에 입사를 못하면 차선으로는 방송 외주 프로덕션을 선택할 수 있었다.

프로덕션은 인하우스 PD에 비해 업무가 굉장히 많고, 반대로 처우는 상당히 열악하기 때문에 방송 PD를 꿈꾸는 지망생들이라도 지원을 꺼려하는 경우가 많다. 또 일을 시작하더라도 금세 그만두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아, 인하우스 PD는 KBS, MBC와 같은 대형 방송국의 정규직 PD를 부르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꼭 방송국 PD가 아니더라도 프로덕션 PD라도 되고 싶었다.

그만큼 방송 만드는 일이 궁금했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방송국보다 비교적 입사가 쉽다던 외주 프로덕션도 나에게는 도무지 기회를 주지 않았다.

보통 외주 프로덕션들은 바로 방송 제작 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즉시 전력감 인력들을 뽑기 때문에, 나처럼 전공도 신문 방송이 아니고, 실무 경험도 전무한 갓 대학 졸업생을 뽑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여간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이미 스무 번도 넘게 서류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처음 들어온 실무 면접 기회였는데. 그게 이력서가 뒤섞였기 때문이라니!


젠장, 보나 마나 탈락이겠네..


"죄송합니다. 저희 쪽에서 실수가 있었네요. 다른 질문드릴게요."


내 앞에는 PD 두 분과 본부장님까지 세 분이 앉아계셨는데 가장 왼쪽에 있는 PD님이 굉장히 미안해하면서 내게 거듭 사과를 하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면 그건 내게 미안해서라기보다는 가운데 앉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던 본부장님께 죄송스러운 마음이지 않았을까? 여하튼.

몇 가지 형식적인 추가 질문이 오고 가고, 얼굴색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가운데 앉아 있던 본부장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면접은 끝났습니다. 혹시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세요?"


그래. 어차피 떨어진 거 한마디 하고 가자.


"이력서에 쓰여있는 과거 경력보다 가능성을 보고 사람을 뽑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력은 미천하지만 가능성은 그 누구보다 크다고 자신합니다."


오글거리는 이불킥 대사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떨지도 않고 또박또박 잘 이야기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붙을 거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날 저녁 문자가 왔다.


-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헐. 이 사람들 나를 왜 뽑은 거지?

이것도 잘못 온 문자는 아니겠지?


그렇게 얼떨떨했지만 설렘을 가득 안고 출근한 첫날.

면접을 보고 후에 나의 사수가 되었던 선배 PD는 나를 뽑은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네가 마지막에 했던 말이 꽤나 인상적이었어.

미안해서 뽑은 건 절대 아니고..

아무튼 우리로서도 아무 경력도 없는 너를 뽑은 건 나름 모험이야. 모험."


"...."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나에게 선배는 이렇게 덧붙였다.


"네가 나중에 아주 유명한 PD가 된다면 이번 일은 아주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기억될 거야.

PD가 될 운명이었다고 해석하자고.


하지만, 네가 그냥저냥 별 볼일 없는 PD가 된다면..

음...


그건 정말 미안한 일이겠네. 흐흐"


2002년 가을. 그렇게 나는 PD의 세계로 들어왔다.


그리고 어느새 20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

.

.


선배님.

이제 진심으로 사과하셔야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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