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를 가다
“평소에 가고 싶었던 나라를 업무를 핑계로 갈 수 있다면 어떨까?”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몇 달에 한 번씩, 원하는 나라를 직접 고를 수 있다면 말이다.
방송 PD라면 가능하다.
물론 여행은 아니다. 출장이며, 일이다.
그렇지만 해외로 나가 TV에서만 보던 풍경을 직접 보고, 낯선 음식을 맛보고, 다른 언어가 오가는 공간에 몸을 던지는 경험은 생각보다 훨씬 유쾌하다.
나는 해외를 30개국 정도 다니면서 적지 않은 문화를 경험해 봤다.
물론 방송을 하기 전에는 해외에는 나가본 경험이 전무했다.
서른이 넘도록 해외 구경 한 번 못 해봤던 나는 ‘이러다 정말 지박령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묘한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꾸역꾸역 200만 원이라는 거금을 모아 인도와 태국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한 달간의 여정은 대단히 즐거웠다..기보다는 하루하루가 서바이벌 미션에 가까웠다!
돈 없이 떠돌아다녔던 탓에 매 순간이 즉흥적이고 불안했지만, 그만큼 기억은 강렬하게 남았다. 물론 결론은 즐거웠다.
하여간 그렇게 해외물 한 번 못 먹어봤다는 서러움은 깔끔하게 털어냈고,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또다시 일을 찾기 시작했다.
당시 프리랜서 5~6년 차 PD는 업계에서 흔히 말해 ‘잘 팔리는 연차’였다.
촬영과 편집에는 노련미가 붙기 시작하고, 무엇보다도 아직까지는 ‘뭔가 하나 제대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의지와 창작열이 가장 뜨겁게 타오른다.
그야말로 전투력이 최고조에 달해 있는 연차.
“이 프로그램 같이 해볼래요?”
“조금만 생각해 볼게요.”
제안은 제법 많았다.
그리고 그 많은 선택지 중에서 나는 일부러 해외 취재 프로그램을 골랐다.
[EBS 세계의 교육현장]
전 세계의 교육 현장을 취재하고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디를 갈지는? 말 그대로 PD 마음이다!
작가가 물었다.
“핀란드 같은 북유럽 교육은 어때요? 한국인들 관심 많잖아요.”
“어후, 너무 많이 나왔지. 다른 신선한 데 없나?”
“그럼 남미는요?”
“남미 좋죠. 나 아직 안 가봤.. 아니,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쿠바는 어때요?”
“오. 쿠바!”
쿠바.
체 게바라. 사회주의. 미국의 경제 봉쇄.
솔직히 말하면 그때 내가 알고 있던 건 그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이 나라에서 우리가 찍을 수 있는 교육 이야기는 뭘까, 대체 어떤 장면이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나대로 자료조사를 했고, 방송국 해외 리서치팀의 도움도 받아 준비를 이어갔다.
알면 알수록 쿠바의 교육은 신비했고,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결국 조연출 한 명과 함께 쿠바로 향했다. 캐나다를 경유해 27시간이 걸린 비행, 체류 기간은 4주.
쿠바는 아마야구 최강국이다. 그러나.
“프로야구는 없어요.”
현지 코치는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선수들은 어떻게 살아요?”
“그냥 살죠.”
‘그냥’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쿠바에는 프로야구도 없고, 아마 선수들은 연봉으로 100만 원도 채 받지 못한다.
그런데도 세계 최고 수준의 기량을 보여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쿠바는 어딜 가나 크고 작은 야구장들이 있고, 다섯 살 아이들도 배트를 휘두르고 슬라이딩을 한다. 내가 직접 봤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야구를 ‘즐기며’ 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잘하는 선수들이 계속 나오는 구조다.
성장한 후에는 마음만 먹으면 가까운 미국의 플로리다나 마이애미로 떠나 어마어마한 부를 거머쥘 수도 있다. 마이애미는 우리로 치면 대한해협 수준으로 가깝다.
실제로 몇몇 선수들은 그렇게 미국 메이저리그로 향해서 성공을 했다. 당시 LA 다저스의 푸이그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쿠바에 남는다.
“왜 안 떠나요?”
내가 묻자,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여기도 나쁘지 않거든요.”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우리도 우리가 가난한 건 알아요. 그래도 여기서 사는 게 꽤 즐거워요. 굳이 돈을 찾아 떠나고 싶진 않아요.”
이해가 될 듯 말 듯한 말이었다.
의료 현장에서도 비슷한 충격을 받았다.
라틴 아메리카 의과대학.
“우리 학교는 등록금이 없어요.”
“공짜라고요?”
“네. 대신 시험에 낙제하면 바로 퇴학이에요.”
“졸업할 때는요?”
“서약서를 써요. 가난한 지역으로 봉사를 나가겠다는.”
“음.. 만약에 그걸 안 지키면요?”
“강제성은 없어요. 하지만 대부분 그렇게 살아요”
“...”
등록금을 전부 지원해 주고 졸업식 때 딸랑 봉사활동을 하겠다는 서약서 한 장만 받는 라틴 아메리카 의과대학의 교육방침은 누구라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촬영 마지막 날,
지진이 난 아이티로 떠나는 의사들의 뒷모습을 찍으면서도 나는 머릿속으로 계속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왜 저런 선택을 하지? 저렇게 살아도 정말 괜찮은 걸까?’
나는 쿠바에 한 달을 머물렀다.
떠날 수 있는데 남는 사람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데도 지금의 삶을 택한 사람들.
그들의 선택이 끝내 명확하게 이해되지는 않았다.
쿠바를 떠나는 날까지 그 질문은 결국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프리랜서로 이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런 질문조차 가질 기회가 없었겠구나.
프리랜서 외주 PD의 가장 큰 장점은 시간의 자유도, 일정의 유연함도 아니다.
내가 보고 싶은 세계를 직접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선택이 내가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기준을 조용히 흔들어 놓는다는 것.
나는 그 경험들이 결국 내 삶의 지평을 넓혀주고 있다고 믿는다.
어찌하다 보니 쿠바 이야기가 길어졌다.
그래도 해외 취재 이야기는 한두 개 정도 더 해도 좋을 듯하다.
다음에는 이스라엘 이야기를 꺼내볼까 한다.
그렇다. 이스라엘, 유대인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