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누구라도 데미안을 떠올리면 입가에 맴도는 구절이다.
나의 외연을 확장하려는 의지가 벽을 부숴야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일까.
책상 위의 데미안을 바라보니 나는 여전히 성장하지 못했음에 통탄한다.
과연 나의 스승은 어디에 있으며 아직도 방황하는 나의 사유는 싱클레어라는 한계에서 언제쯤 벗어날까.
데미안은 인간의 습성인 선악의 이분적 구별을 비판한다.
마치 자신은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 같다.
우리가 겪는 고통과 갈등은 내부와 외부를 구분할 수 없다.
결국, 외부의 일이 내부의 일이 되고 내부의 일은 외부로 표출된다.
데미안은 이 것이 세상을 선악으로만 구분 짓는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카인과 아벨, 십자가의 두 도둑에 대하여 신박한 해석을 내놓는다.
"카인은 탐욕스러운 살인자가 아니야. 그는 강한 내면의 소유자로 신에게서 최초로 독립한 인간이야."
"십자가에 매달린 두 도둑을 봐. 끝까지 굽히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 그 사람이야말로 자신의 진정한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인간이야."
아, 데미안에게서 익숙한 냄새가 난다.
그것은 니체와 차라투스트라의 체취이다.
데미안은 니체가 말한 초인인가.
진짜는 어딘가에 있지 않고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땅 위에 있으니 스스로 구원하라는 차라투스트라의 메시지가 들려온다.
헤르만 헤세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유럽을 바라보며 신의 존재를 회의적으로 바라본 건지 모른다.
그때까지 유럽을 지탱한 기독교적 도덕관을 향한 믿음도 함께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어지럽고 사는 일이 고통스러우면 무신론자들은 신을 찾게 되고 신을 믿었던 자들은 신은 죽었다고 눈물을 흘리기 마련이다.
싱클레어가 에바를 만나 느끼는 사랑의 감정은 생각보다 이질적이었다.
나에게도 첫사랑이었던 그녀는 성스러운 여신이었고 동시에 관능적인 인간이었다.
두 얼굴을 가진 여신, 아프락사스.
싱클레어는 계시를 받은 것처럼 꿈을 통해 에바가 아프락사스의 얼굴을 가진 여자라고 확신한다.
그는 아프락사스를 열망하고 있던 것이다.
사랑의 순수한 감정이라기보다 신성한 무언가를 바라는 봉헌에 가까운 사랑이라 이질적이었을까.
선과 악을 모두 가진 아프락사스는 오래된 얼굴과 새로운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싱클레어가 피스토리우스를 만나고 꾸었던 꿈에서 만난 어머니이자 연인이며 동시에 창녀인 낯선 여인을 말한다.
어쩌면, 신이 두 얼굴을 가졌다는 건 인간에게 불행한 일일 것이다.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세상, 급속한 산업화로 전통적인 계층사회는 격동하고 열린 뱃길을 통해 동양의 새로운 문화가 흘러 들어온다.
결국, 아노미 상태가 벌어진다.
오죽하면 불교를 악마를 믿는 종교로 묘사한 그림과 글이 유행이었을까.
헤세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그는 새로운 유럽을 꿈꾸었을까.
어차피 전쟁으로 파괴된 유럽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건설을 하기 위한 기초는 마련된 것이 아닐까.
인도의 시바신을 떠올린다.
그 신화는 파괴와 창조를 하나로 본다.
유럽의 전통적인 기독교 문화와 오리엔탈 문화가 섞여 새로운 사상이 태어난다면?
그것은 기존에 있던 것이 아니므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존재이다.
바로, 이분법적인 구분에서 벗어나 내면의 힘으로 스스로 서는 것이다.
데미안은 어디로 간 것일까.
부상당한 싱클레어의 곁에 누워 있던 데미안은 어디로 갔을까.
조국을 위하여 러시아와의 전쟁에 나선 데미안과 역사의 너울 앞에 자신의 운명을 시험하고자 했던 싱클레어.
나는 데미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는 싱클레어의 내면이었다고 생각한다.
싱클레어가 그렇게 되고 싶던 어떤 형태, 초인의 모습, 열망의 화신이 데미안이었다.
그러한 데미안이 사라졌다는 건 결국 싱클레어가 자신을 향한 치열한 성장을 이루어낸 것이다.
길고도 지루했던 고뇌를 끝내고 상념들을 통합하여 새롭게 태어난 자신.
알을 깨고 나온 새를 묘사한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