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퍼센트의 강인함을 뚫고 나오는 1퍼센트의 유약함이 내 삶을 지배할 때가 있다. 자신감 있는 태도로 확신을 갖고 살아가다가 문득 불안 가득한 눈물이 차오를 때가 있다. 그런 종류의 슬픔은 너무나도 아득해서 어디서 시작했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어디가 땅인지 모르고 바다 한가운데서 허우적대며 숨을 마시려는 사람처럼 절망적이다. 계속해서 팔과 다리를 저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집에 오는 퇴근길에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한 소절이 단숨에 나를 마비시키고, 잠시 쉬려고 앉은 공원에서 걱정 없이 뛰어노는 아이들에 울컥하기도 한다.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질문들이 내 가슴에 꽂힐 때 나는 그런 것도 생각해보지 않고 무슨 길을 걸어가고 있었는지 시름에 빠진다.
나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해놓고 몇 번이고 타인의 삶에 흡수된다. 존재하는 것들보다 소유하는 것들로 쉽게 완성되는 한 사람의 인생과, 그런 사람들을 선망의 대상으로 삼으며 열심히 등에 짐을 짊어지고 개미처럼 걸어가는 사람들의 줄을 바라본다. 하지만 안다. 그렇게 평범한 줄에 서는 것조차도 버겁다. 그 줄에서도 낙오된다면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남들이 좋다고 하는 먹이라도 챙겨놓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들은 가난에 불행하고, 남들이 좋다는 것을 챙기느라 고생한 자들은 그것이 쓸모없음을 느끼며 불행하다.
나이가 들수록 예능을 보기가 어렵다. 예능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 누군가 불행한 눈빛을 하고는 억지로 웃고 있다. 남들이 웃는 타이밍에 맞춰 박수를 쳐대며 웃고, 그 상황이 끝나면 다시 멍해지는 그 사람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프다. 넋 놓고 있는 그 사람의 어깨를 만지며 조금만 힘내라는 MC의 손길도 아프다. 타인에게 웃음을 안겨주기 위해서 행복을 연기해야 하는 사람들의 웃음은 쓰다.
그래도 지금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본인의 재능을 보여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무대를 완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청춘들의 움직임이 애절하고도 멋스럽다. 완숙하지 않은 모습이지만 본인이 가진 것을 모두 연소시켜 조금이라도 더 많은 감동과 박수를 받으려는 몸부림이 애처롭고도 아름답다. 하지만 그들은 그래야만 본인의 삶을 증명할 수 있다. 청춘이라는 이름의 정체성은 직업으로서의 증명에서 비로소 형성된다. 직업을 통해 하나의 사회적인 인간이 되었다고 느낀다. 그것이 미래에 허무로 다가올 지라도 하는 수 없다.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보다 무언가가 되려는 움직임이 후회를 줄인다.
나는 남들보다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기보다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대단하지 않아도 계속할 수 있는 힘이 내 삶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하며, 아직 아무것도 아니어도 언젠가는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응원을 주고 싶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최고가 아니라도 최선을 다 하자고, 성취보다 노력을 기억하며 살아가자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런 나는 청춘이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하다 얼마 남지 않은 휴대폰 배터리를 보고 벌떡 일어나 황급히 충전을 시키다 눈물을 쏟았다. 내 청춘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으면서 언제 올 지 모르는 섭외 연락을 못 받을까봐 매일같이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선택받아야 살아남는 사람들의 삶은 대개 이렇다. 좋은 기회 앞에서 스스로 희망 고문한다.
가끔은 길을 잃을 때가 있다. 양 손 가득 무언가를 챙겼지만 내가 이걸 왜 챙겼는지 잊을 때가 있다. 분명 얻을 때는 중요하다 생각했는데 한 번도 쓰지 않은 것들도 가득하다. 무언가 빼먹은 것 같아 뒤를 돌아본다. 돌아가려니 온 길이 멀고 다시 앞으로 가자니 불안하다. 나는 그럴 때마다 가만히 멈춰 선다.
며칠 내내 집에서 우두커니 있었다. 방전된 내 휴대폰의 배터리와 노트북을 충전시키며 나도 충전시켰다. 두 시간 넘게 운동을 하며 땀을 뻘뻘 흘렸다. 집에 와서 맛있는 요리를 해 먹고 좋은 음악을 들었다. 기운을 내 다시 길을 가려니 목적지는 알겠는데 가는 방향이 어렴풋하다. 앞으로도 몇 번은 더 길을 잃겠구나 싶어 양 손에 든 짐 내려놓고 가볍게 다시 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