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꿈

by 주모운

요즘 들어 제법 나태해졌다. 잠시 휴식기를 가졌다고 해야 할까. 마치 농구 한 쿼터가 끝나고 교체당한 선수가 벤치에 앉아 쉬는 기분이다. 다음 쿼터에 나갈 수도 있으니 마음껏 긴장을 풀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이 쉬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기에 깊은 숨을 마시고 오래도록 내쉰다. 지난 쿼터에서 내 플레이가 어땠는지 머릿속에서 리플레이 해본다. 모든 것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좋았던 부분과 몇 번의 실수가 기억난다. 내가 뭘 해야 하는지 곰곰 생각해본다.


코트에서 빠져나온 나는 멍해진다. 코트 위에서는 생각나지 않던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그런 것 중엔 중요한 것도 있고 하찮은 것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모두 내 일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시합에서 승리하면 그 일들을 차근차근 해결해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이 시합에서 승리해야 한다.


옥상에 펼쳐놓은 텐트에 매일같이 오래 앉아 있는다.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반려견 공칠이와 함께 오래도록 멍하니 있는다. 성공하겠다는 욕심에 치여 정리하지 못하고 넘어간 마음들을 하나씩 펼친다. 제대로 쉬지 못하고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한 순간들을 떠올린다. 가난한 사람에게 사랑은 사치라고 생각해서 미루고, 가난에서 벗어나니 성공하지 못한 사람에게 사랑은 사치라고 말하게 됐다. 성공 하나 때문에 삶의 많은 부분들이 희생당한다.


이런 생각이 잘못됐다 해도 자꾸만 성공이 눈에 잡힐 것 같아 새로운 사랑을 삶에 집어넣을 수가 없다.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물꼬를 틀 것 같은 승리의 문 앞에서 십 년을 넘게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단 사랑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나의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스스로 포기하며 살아온 것이다.


<태양은 없다>나 <트레인스포팅> 같은 청춘영화의 주인공은 이제 포기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앳된 얼굴로 명연기를 하고 싶었던 나는 이제 성인으로 넘어가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 시간이 마치 다음 쿼터를 준비하는 선수처럼 새롭게 느껴진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반성과 내가 맡은 포지션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겠다는 다짐으로 무장한다. 성인이 된 나에 대해 조사하고 연구해야 하며, 배우가 되겠다고 살아온 십육 년 대신, 배우를 포기하지 않고 역량을 키워나갈 앞으로의 십 년을 맞이해야 한다.


해서 하루가 멀다 하고 프로필을 돌리거나 에이전시를 찾아가는 일을 멈추고 며칠 내내 집에 오래 머물렀다. 새롭게 질문을 던지고 새 답안지를 마련하는 중이다. 과거에 적어 둔 이십 년 후의 나와 많이 달라진 현재의 나는 다시 미래를 작성해야 한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스스로를 많이 안다고 자부하던 나는 살아갈 방법을 조금씩 변형시키기로 마음먹는다. 나의 신념을 버리거나 하는 일은 아닐 테지만 조금 더 현명하고 영리한 방법을 찾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내가 살아온 시간 동안 몸에 익은 세포 하나하나의 반응을 바꾸는 일이다. 좋게 말하자면 세포가 반응하는 경우의 수를 늘리는 일이겠다.


하지만 오래 쉴 수는 없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감독이 날 필요로 할 때면 언제든 코트로 튀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 이 시간 동안 나를 많이 다독여야 한다.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재정비가 되고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하루 앞을 걱정하지 않고 십 년 뒤를 그리는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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