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울방울

by 주모운

좋은 소설을 읽은 탓에 밤을 새웠다. 동글동글한 문장들이 비눗방울처럼 마음속에 떠다니다가 가슴 곳곳에서 펑펑 터진다. 내 일도 아닌데 남의 이야기에 이렇게까지 아파해야 하나. 그다지 슬픈 내용도 아닌데 단어와 문장에 외로움과 공허가 서려 있다.

나도 다시 글을 써야지. 돈을 버느라 한 동안 멜로 영화도 보지 못했고 슬픈 소설 한 편 읽지 못했으니까. 돈을 벌 때는 최대한 즐거운 생각만 해야 한다.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무언가를 즐기면 단순하게 일에 집중할 수가 없다.

예술이 너무 하고 싶어서 두 발을 동동 구르던 때가 기억난다. 예술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래도 예술을 하고 살겠다고, 태어날 땐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죽을 땐 예술가로 죽겠다고 포부를 던지던 어린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 보들레르, 서머싯 모옴, 장 피에르 다르덴, 이창동, 헤밍웨이, 하루키, 데미안 라이스, 오아시스, 김광석, 이문세 같은 사람들 이야기로 밤새워 술 마시고 떠들면서 멋진 예술가가 되자고 하던 나는 돈 좀 없다고 주눅 드는 내가 너무 싫어서 예술을 안주머니에 넣어두고 돈을 벌었다.

가난이 싫다면서 술에 취해 예술 예술 거리는 꼬락서니가 한심해서 일단 인간답게 살자고 돈을 벌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부자가 되지도 못했다.

나도 저런 곳에 출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재미없는 드라마를 켜놓고 빨래를 개다가 좋은 영화의 첫 장면에 반하면 약속도 취소하고 하루 종일 영화에 젖는다.

그래, 세상에 좋은 영화와 좋은 글이 많지. 어렸을 적 적어놓은 좋은 사람 리스트에는 온통 누군가가 힘들 때 안아줄 수 있는 사람,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 소중한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 같은 것들이었지, 돈 많은 사람과 유명한 사람은 없었는데 나는 열여섯 해의 험난한 서울살이 덕에 많이도 변했다.

아마도 화가 나서 그랬다. 자꾸 누가 날 무시하니까, 내가 더 잘하는 것 같은데 더 못하는 애들이 나와서 판을 치니까. 그게 그렇게 싫어서 일단 성공하자고, 그러면 훨씬 많은 것들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마음은 그런데 팔자가 아닌지 성공만을 좇는 게 어렵다. 좋아하는 일을 자주 하며 사는 사람이 되려고 했는데 좋아하는 일도 싫어하는 일이 될까 두렵다. 그래서 마음도 없이 일을 한 적이 있다. 집으로 돌아오면 침대에 누워 부끄러움을 삭혔다.

그러다 최근에 네 명이 팀이 되어 단편영화를 하나 만드는 중이다. 부족한 스태프와 열악의 끝을 달리는 현장에서 자급자족으로 무언가를 만드는데 새삼 새롭다. 자칫 엉망이 될 것 같기도 한데 재미있다. 실패작으로 남더라도 뜻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꺼내놓고 거기서 추리고 추려 무언가를 조립하는 모양새가 마치 어렸을 적 소꿉친구들과 모여 변신 로봇을 만드는 기분이다.

시행착오가 많던 촬영은 결국 해가 뜨고 끝이 났고, 집 앞에서 국밥에 소주 한 잔을 걸치고 하루 내내 단잠을 잤다. 얼마 만에 깊은 잠이었을까. 좋아하는 걸 열정적으로 하고 나면 이렇게 마음 편히 자는구나. 불면증 환자가 아니라 좋아하는 걸 못해서 마음에 병이 생겼구나. 아,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야지.
그게 하나도 유명하지 않아도, 대단한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누군가가 무시하고 지나쳐도,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야지.
그래야 만수무강할 팔자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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