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족되지 않는 갈증
새벽 2시 47분.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켰다. 그냥 시간 확인하려고 켠 건데, 어느새 쇼핑 앱을 열고 있다.
장바구니 78개.
언제 이렇게 담았는지도 모르겠다. 무선 이어폰, 향초, 요가 매트, 전기 포트, 책 다섯 권... 살 것도 아니면서 담아둔다. 마치 언젠가는 살 것처럼.
'위시리스트'라는 이름이 정확하다. 소원 목록. 이걸 다 사면 뭔가 달라질 것 같은 막연한 기대.
하나를 산다. 할인 쿠폰 때문에. 아니, 그냥 뭔가 사고 싶어서.
'구매 완료'
잠깐의 만족감. 도파민이 확 올라왔다가 금세 가라앉는다.
그리고 다시 스크롤을 내린다.
"이번 달은 진짜 아껴야지."
통장에 월급이 들어온 날 아침의 다짐이다.
점심시간. 동료가 새로 산 가방을 들고 왔다. 예쁘다. 검색해본다. 생각보다 비싸지 않다. 아니, 월급 들어왔으니까 괜찮다.
'구매하기' 클릭.
퇴근길. 백화점 세일 문자가 왔다. 70% 할인이라니. 안 사면 손해 아닌가? 들어가서 구경만 하려고 했는데 나올 때는 쇼핑백 두 개.
집에 와서 계산해보니 벌써 월급의 3분의 1이 사라졌다.
내 방을 둘러본다.
작년에 산 가방들. 한두 번 들고 나간 신발들. 읽지 않은 책들. 뜯지도 않은 화장품들.
이 모든 게 그때는 꼭 필요했다. 아니, 필요하다고 믿었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다.
"인간은 원하는 것을 얻기 전까지는 결핍을 느끼고, 얻은 후에는 권태를 느낀다."
정확하다. 무서울 정도로.
"아메리카노 톨 사이즈 하나요."
하루에 커피 두 잔. 한 잔에 4,500원. 한 달이면 27만 원.
알고 있다. 집에서 타 먹으면 훨씬 싸다는 것. 텀블러를 사용하면 환경에도 좋다는 것.
하지만 매일 카페에 간다.
왜일까?
커피가 필요해서가 아니다. 그 '경험'이 필요한 거다. 예쁜 카페에 앉아 있는 나. 브랜드 로고가 박힌 컵을 들고 걷는 나. 뭔가 여유로워 보이는 나.
4,500원에 사는 건 커피가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이다.
친구가 SNS에 올린 사진. 발리의 한 카페. 선셋을 배경으로 찍은 커피 한 잔. 좋아요 237개.
부럽다. 나도 저런 사진을 찍고 싶다. 저런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 또 검색한다. 발리 항공권. 숙소. 투어.
갈 수도 없으면서.
"이번엔 진짜 운동해야지."
1년 회원권을 끊었다. 55만 원. 운동복도 새로 샀다. 15만 원. 운동화는 필수다. 18만 원. 프로틴도 필요하다. 8만 원.
총 96만 원을 투자했다.
첫 달은 열심히 갔다. 주 3회. 둘째 달은 주 1회. 셋째 달부터는...
회원권은 11개월이나 남았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매몰 비용의 오류'. 이미 쓴 돈 때문에 계속 붙잡고 있는 것. 하지만 정작 운동은 하지 않는다.
아니, 운동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나 보다.
'운동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다.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사람. 인스타그램에 운동 사진을 올리는 사람.
물건을 사는 것도, 회원권을 끊는 것도 다 같은 이유다.
'더 나은 나'를 사려는 것.
부처는 말했다. "갈애(渴愛)가 고통의 원인이다."
목마름처럼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하는 마음. 그게 우리를 괴롭게 한다고.
에피쿠로스는 구분했다.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구 - 먹고 자는 것 자연적이지만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 - 맛있는 음식 공허한 욕구 - 명예, 권력, 사치품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은 대부분 세 번째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일기에 썼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내게 필요 없는가!"
로마 황제였던 그도 알았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더 많이 원하게 된다는 것을.
작년 이맘때 미니멀리즘에 빠졌다.
마리 콘도의 책을 읽고 대대적인 정리를 시작했다. '설렘을 주지 않는 물건'은 다 버리기로 했다.
옷 50벌을 버렸다. 책 100권을 중고서점에 팔았다. 각종 소품들을 나눔했다.
깨끗해진 방. 텅 빈 옷장.
뿌듯했다. 한 달 정도는.
그리고 다시 사기 시작했다.
"이번엔 정말 필요한 것만." "질 좋은 것으로 하나만." "미니멀한 디자인으로."
1년이 지난 지금, 옷장은 다시 가득 찼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다 비슷한 스타일이라는 것뿐.
미니멀리즘마저 하나의 '스타일'이 되어버렸다. 소비를 줄이려던 시도가 또 다른 소비의 명분이 됐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상품"
알고리즘은 나보다 나를 잘 안다. 내가 뭘 검색했는지, 얼마나 오래 봤는지, 언제 장바구니에 담았는지.
한 번 운동화를 검색했더니 모든 광고가 운동화다. 한 번 여행 상품을 봤더니 계속 여행 광고가 뜬다.
욕망이 욕망을 부른다.
원래는 필요해서 찾았는데, 이제는 보여주니까 원하게 된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모르겠다.
'최근 본 상품' '함께 구매하면 좋은 상품' '지금 안 사면 품절'
FOMO. Fear of Missing Out.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세일을 놓치면 손해 본 기분. 한정판을 못 사면 뒤처진 기분. 남들 다 가진 걸 나만 없으면 소외된 기분.
그래서 산다. 필요해서가 아니라 불안해서.
또 잠이 안 와서 뒤척이다가 일어났다.
발코니로 나가 도시를 내려다본다. 불 꺼진 아파트들. 간간이 켜진 불빛들. 저 불빛 뒤에도 나 같은 사람이 있을까? 장바구니를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하는.
문득 생각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
이 모든 물건 뒤에, 이 모든 욕망 뒤에 숨어 있는 진짜 갈증은 뭘까?
안정감? 인정? 사랑? 의미?
아니면 그냥... 공허함을 채우려는 헛된 시도?
톨스토이의 우화가 떠올랐다.
한 농부가 하루 동안 걸어서 돌 수 있는 만큼의 땅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그는 욕심을 내어 계속 걸었다. 더 많이, 더 멀리. 해가 지기 전에 출발점으로 돌아와야 했다. 마지막 순간, 간신히 도착했지만 그는 쓰러져 죽었다.
우리도 비슷하지 않을까.
더 많이 갖기 위해 달리다가, 정작 왜 달리는지 잊어버린다.
내일부터 일주일. 작은 실험을 하기로 했다.
'무買 주간'. 아무것도 사지 않기.
식료품과 교통비를 제외하고는 지갑을 열지 않기로. 쇼핑 앱도 지웠다.
벌써 불안하다.
뭔가 필요한 게 생기면 어떡하지? 좋은 세일을 놓치면?
하지만 궁금하기도 하다.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사지 않으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정말로 불편할까? 아니면 오히려 자유로워질까?
쇼펜하우어가 또 말했다.
"부는 바닷물과 같아서 마실수록 더 목마르다."
그렇다면 마시지 않으면?
갈증 자체가 사라질까?
아니면 진짜 목마름이 뭔지 알게 될까?
장바구니를 비웠다. 78개 전부.
텅 빈 화면이 오히려 시원하다.
이제 채울 차례다.
물건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월요일, '타인이라는 지옥'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