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말을 아끼게 되는 날들」

속으로만 자라나는 마음들

by 윤숨

요즘 나는 말을 아낀다.

누군가 물어보면 대답은 하지만, 먼저 말을 꺼내는 일은 드물어졌다. 필요한 말만 하고, 나머지는 속으로 삼킨다.

언제부터였을까. 말이 이렇게 무거워진 것이.

벽에 부딪혀 튕겨 나온 말들

예전에는 말을 많이 했다. 생각나는 대로, 느끼는 대로.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 말들이 벽에 부딪혀 튕겨 나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런 게 뭐가 중요해?" "너무 예민한 것 아니야?" "다 힘들어, 너만 힘든 게 아니야."

말할 때마다 돌아오는 반응들. 처음에는 그래도 계속 말했다. 이해받고 싶어서, 공감받고 싶어서.

하지만 점점 지쳐갔다. 내 말이 상대방에게 닿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때, 말하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말을 아끼게 되었다.

혼자서 잘 지내요, 라는 거짓말

"요즘 어때?"

누군가 묻는다. 나는 습관적으로 대답한다.

"혼자서 잘 지내요."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잘 지내는 게 아니라, 그냥 지내고 있을 뿐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고, 그냥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을 뿐.

정말로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 오늘 있었던 작은 기쁨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슬픔도, 이유 없이 밀려오는 외로움도.

하지만 말하지 않는다. 말해봤자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아니까. 아니면, 이해받지 못했던 기억이 너무 선명해서.

가슴 안에서 곰팡이처럼 피어나는 것들

말하지 못한 감정들은 어디로 갈까.

사라지지 않는다. 가슴 안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곰팡이처럼 조용히 번져간다. 처음에는 작은 점 하나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커진다.

미안했던 마음, 서운했던 마음, 외로웠던 마음, 화났던 마음. 모든 감정들이 말로 나오지 못한 채 안에서만 자란다.

가끔 밤에 혼자 있을 때, 그 감정들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말하고 싶다는 충동이 밀려온다. 하지만 누구에게 말할까. 이 시간에 누가 내 말을 들어줄까.

그래서 다시 삼킨다. 그리고 커피를 끓인다.

말 대신 커피를 끓이는 밤

커피 내리는 소리가 좋다. 물이 끓는 소리, 원두가 갈리는 소리, 드립하는 동안의 고요함.

그 시간 동안만큼은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아무도 내게 묻지 않는 시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창밖을 본다. 다른 집들의 불빛을 보면서 생각한다. 저 집에도 나처럼 말을 삼키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저 집에도 혼자 커피를 마시며 밤을 견뎌내는 사람이 있을까.

'괜찮아'라는 말에 깃든 수백 가지 뜻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괜찮아'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수백 가지 뜻이 숨어 있다.

"괜찮아" - 사실은 괜찮지 않지만, 말해봤자 소용없을 것 같을 때. "괜찮아" - 더 이상 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을 때. "괜찮아" - 상대방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걱정될 때. "괜찮아" - 내가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되기 싫을 때.

모든 '괜찮아' 뒤에는 말하지 못한 진짜 마음이 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아무도 묻지 않는다.

침묵의 관계들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도 침묵한다.

연인과는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만, 정작 마음 깊은 곳의 외로움은 말하지 않는다. 혹시 부담스러워할까 봐, 혹시 이해하지 못할까 봐.

가족과는 안부는 묻지만, 정작 힘든 일들은 말하지 않는다. 걱정 끼치기 싫어서, 괜히 분위기 무겁게 만들기 싫어서.

친구들과는 재미있는 이야기는 하지만, 정작 속마음은 털어놓지 않는다. 진부하게 들릴까 봐, 별거 아닌 일로 오해받을까 봐.

그렇게 모든 관계에서 조금씩 침묵한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한다고 착각하면서.

대화 없는 연결

몇 년 전, 가장 가까웠던 친구와 멀어졌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조금씩, 조금씩.

서로 바빠졌고,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대화도 점점 줄어들었다. 안부 정도만 주고받다가, 나중에는 그것조차 뜸해졌다.

어느 날 깨달았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걸. 몇 년 동안 함께 있었지만, 정작 서로의 마음속 깊은 곳은 모르고 있었다는 걸.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왜 그걸 잊고 살았을까.

오해가 자라나는 침묵

침묵은 때로 오해를 만든다.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추측한다. 그리고 그 추측은 대부분 틀렸다. 하지만 정정할 기회를 놓치면, 그 오해는 진실처럼 자리 잡는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괜찮은 줄 알았어." "화가 났는 줄 알았어." "관심 없는 줄 알았어."

수많은 관계들이 이런 오해 속에서 멀어진다. 말 한마디면 풀릴 수 있는 일들이, 침묵 때문에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나는 정말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인가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정말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일까.

어렸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궁금한 것도 많이 물어봤고, 하고 싶은 말도 많이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렇게 말을 아끼게 되었을까.

아, 기억난다.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졌을 때부터다. 내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없어졌을 때부터다.

그러니까 문제는 내가 표현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표현해도 될 대상이 없었던 거다.

들어줄 누군가를 찾아서

지금도 찾고 있다. 내 마음을 들어줄 누군가를.

판단하지 않고, 조언하려 들지 않고, 그냥 들어주는 사람. 내 감정을 무시하지 않고, 별거 아니라고 치부하지 않고,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는 다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속에 쌓아둔 이야기들을,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누군가의 "그 말, 나도 하고 싶었어"

며칠 전, 용기 내어 한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얼마나 말하고 싶었는지.

친구가 말했다.

"그 말, 나도 하고 싶었어."

그 한마디에 마음이 무너졌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나만 말을 삼키고 있었던 게 아니었구나.

우리는 그날 밤늦게까지 이야기했다.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속으로만 키워왔던 감정들을.

말하고 싶은 마음이 다시 싹틀 때

그 이후로 조금씩 변하고 있다. 말을 완전히 되찾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말하고 싶다는 마음이 다시 생겼다.

모든 사람에게 다 말할 필요는 없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최소한 한 사람, 진심으로 들어줄 한 사람은 있어야 한다는 것도.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누군가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사람이.

마음은 여전히 이야기를 쓰고 있다

말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도, 마음은 여전히 이야기를 쓰고 있다.

매일 밤 새로운 페이지를 써내려간다. 오늘의 감정, 오늘의 생각, 오늘의 희망과 절망을. 아무도 읽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계속 쓴다.

언젠가는 그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눌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내 마음을 이해해줄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그때까지, 나는 기다린다. 그리고 오늘도 마음속에서 이야기를 쓴다.

조용히, 천천히, 정성스럽게.


잠시 멈춤, 홈 플레이트에서 나에게 건네는 질문

당신이 가장 최근에 삼킨 말은 무엇이었나요?

당신의 마음은 지금 어떤 이야기를 쓰고 있나요?

누군가 당신의 그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말하고 싶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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