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木
나는 노는 걸 좋아한다. 물론 노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느냐만은, 간혹 이 나이쯤엔 어떻게 놀아야할지 잘 모르겠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도 있다. 기회가 안 되어서, 시간과 체력과 자원이 부족해서, 혹은 배워본 적이 없어서, 무엇이 자신을 즐겁게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해서 그저 일과 생활에 모든 걸 바쳐온 사람들. 책임과 의무로 단단히 자신을 감싸고, 간혹 스며드는 타인의 인정과 애정에만 간신히 위안을 얻는 사람들. 그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경의를 표하지만, 그럼에도 살짝은 권해주고 싶다. 인생을 좀 더 가볍게 할 쉼표를 찍어보라고.
나는 삶이 이미 너무 가볍다 못 해 둥둥 뜰 지경이라 늘 나를 묶어둘 말뚝을 필요로 하는 형편이지만, 그럼에도 환상에 한 눈 팔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일도 공부도 살림도 극한의 귀차니스트답게 마감 직전에 벼락치기 하기 일쑤면서 노는 것만큼은 부지런하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걸 하고 노느냐 하면 그도 아니다. 내 유희는 언제나 영화, 책, 게임의 노선을 크게 벗어나진 않았고, 아주 드문 나들이나 산책, 여행, 공연 및 전시 관람으로 콧바람을 좀 쐬어주는 게 다다. 정말 제대로 노는 사람들에 비하면야 그 열정도 깊이도 비할 바가 못 된다. 다만 확실히 잊지 않는 것은, 사람에겐 언제나 생존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아이와 둘이서만 보내는 나날에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함께 유희의 장을 열었다. 아이가 백일이 지나고 서서히 앉을 수 있게 되면서, 차츰 선물 받은 딸랑이나 모빌 같은 것들이 효용을 찾기 시작했다. 아직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도 않고, 시야가 선명하거나 다채롭지도 못하지만, 아이는 손을 꼬물거리고 입으론 꿍얼거리며 새로운 세상을 탐색해 나간다. 처음 듣는 소리, 처음 만져보는 감촉, 알 수 없는 냄새, 낯선 모양들. 아이는 세상을 발견해 나갈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발견해 나가기도 한다. 잡을 수 있다, 흔들 수 있다, 몸을 돌릴 수 있다, 발을 뻗을 수 있다.
아이가 자신의 의외의 능력에 놀라고, 감탄하고, 뿌듯해하는 표정을 나는 1등석에서 관람한다. 아이가 무엇을 보거나 느끼고 갑작스런 웃음을 터뜨릴지 알 수 없어서, 매 순간이 아이와 똑같이 기대와 호기심에 차 있다. 장난감과 인형으로 아이를 둘러싸주지만 실은 이미 주위의 모든 물건과 공간이 유희의 대상이다. 내 아이를 마주하고서야 나는 깨달았다. 아이를 낳는 순간 시간여행이 가능해진다는 걸. 모두가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하는 어린 시절을, 내 아이의 몸과 마음에 빙의해서 다시 살아볼 수 있는 기회라는 걸.
물론 아이와 함께하는 모든 시간이 희희낙락하지만은 않다. 언제나처럼 그 순간은 인스타그램에나 새겨질 반짝거리는 단락일뿐이고, 대부분의 나머지 시간은 여전히 지리멸렬한 생존을 위해 투자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이들이 잠을 많이 잔다는 거랄까. 비록 그 또한 토막잠들의 연합이라 먹고 자고 싸는 주기가 하루 12번도 더 돌아간다는 게 함정이라 할지라도, 그 시간들 역시 어찌저찌 버텨낼 수 있다. 나는 그저 아이가 자는 동안의 여유 시간을 어떻게 쓸지 저글링하는 연습이 필요했을 뿐이다. 나는 아이에게 빙의하는 시간들 속에서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주로 게임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조금 썼다.
다른 것들은 별 문제 없이 세관(?!)을 통과하겠지만 ‘게임’에 대해서만은 일부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을 안다. 특히나 아이를 가진 부모로서의, 더구나 엄마로서의 입장들은 대체로 게임과는 대척점에 있다는 것도 안다. 하물며 온라인 게임에 빠져서 아이를 돌보지 않은 젊은 부모들의 뉴스라도 뜰라치면, 나는 내 취향과 가치관을 선뜻 다른 이들에게 내보이기 쉽지 않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역을 충분히 객관적으로 변호할 수 있다고 여긴다.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영역 자체가 아니라, 그 세계 안의 널뛰는 스펙트럼 속에서 어떤 가치 판단을 할 수 있고,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느냐이다. 책이든 예술이든 그 어떤 분야가 되었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절대선도 절대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을 마주하는 내 태도는 언제나 악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배척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을 지척에 두고 살펴보고 탐구해서 선과의 차이점을 구분해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미묘한 경계선을 긋는 방법을, 사실 모두 공부가 아니라 놀이를 통해서 배운다.
어떤 사물이든 어떤 영역이든 한 면이 아닌 여러 면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은 특권이자 능력이다. 나는 내 아이에게도 그것을 물려주고 가르쳐주고 싶다. 다양한 세상과 문화를 향유하고 음미하고 무엇이 스스로에게 좋은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터득하게 하고 싶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놀이’의 영역을, 일찌감치 포기하게 두고 싶지 않다. 실은 사람들 간의 관계조차, 가장 깊은 유대감조차 바로 함께하는 ‘놀이’에서 비롯되니까. 우리 모두의 추억은 사실, 주고받은 물건보다 함께 깔깔거리며 웃었던 시간들로 기억되니까.
그래서 당당하게 이실직고하자면 나는 아이가 통잠을 자기 시작한 이후부터 밤에도 남편과 자기 직전까지 게임 삼매경이었다. 다만 우리 둘 다 스포츠와 경쟁에는 취미가 없는 사람들이라, 우리는 항상 낯선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롤플레잉 게임들에 매진했다. 현실의 재화로 디지털 조각을 수집하는 확률 게임을 하기에도 둘 다 마음이 콩알만한 소심쟁이들이라 매력을 못 느낀다. 우리는 언제나 안전한 소파에 기대 앉아, 새로운 캐릭터들을 만나고, 새로운 이야기들을 듣고, 치열한 전략 싸움을 벌이고 보물 찾기를 하며 아름다운 그래픽이 그려주는 풍경에 빠져든다. 그리고 감동적이거나 충격적이거나 신나는 서사의 끝에, 항상 언젠가 우리의 아이가 이 시간을 함께하는 꿈을 그린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게임에 빠져 참지 못하는 너스레에 방에 잠든 아이가 깰까 쉬쉬하는 형편이지만. 어쩌면 여전히 이렇게 어리기만 한 부모를 보고 나중에 머리가 커버린 아이가 핀잔을 줄지도 모를 일이다.
“엄마 아빠, 그만 좀 놀고 자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