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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난 아기와 함께하는 나날들은 본격 연구의 장이다. 끊임없는 실험과 일지 작성. 미세한 변수 조정과 실험체의 각별한 관리. 각종 다른 사례 보고서의 탐구. 거기다 실험체는 아기 하나만은 아니다. 엄마인 나 자신도 포함된다. 들쑥날쑥하는 호르몬으로 인한 감정 변화에 신체적, 인지적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한 활동에는 얼마만큼의 자원을 투자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조정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요즘의 유행(?!)과 달리 그 모든 걸 독자적으로 해내기로 멋대로 맘먹고는, 고작 백과사전식 육아책 하나와 각종 인터넷 정보들로 얼기설기한 계획서를 머릿속에 쑤셔넣고 곧장 실전에 돌입했다. 나는 언제나 이론서는 이론일 뿐이고, 오직 경험만이 제대로 된 지식을 축적한다는 입장이니까. 그건 무지개에 일곱 빛깔이 있다고 정의하는 이론을 읽는 것과 스펙트럼을 통과한 수만가지 결의 빛깔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의 차이다. 거기다 실전이라는 건 그런 고운 빛깔의 완벽한 무지개가 아니라, 어느 날 하늘도 아닌 벽면에서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무지개의 파편을 발견하는 일이다.
친정에서 50여일을 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이와 홀로 지내며 50여일이 지났다. 물론 남편이 저녁과 주말엔 함께였지만, 외벌이 가장으로서 육아를 돕기엔 한계가 있다. 그저 사람, 외부인에 대한 극심한 거부감과 불신으로 가득찬 나에겐 다른 선택지 따윈 없었다. 때마침 나는 긴 신혼 동안 식물처럼 지내며 자아에 대한 강박이 아주 흐릿해져 있었고, 덕분에 아기를 위한 체온+먹이+배설 스테이션으로 변신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 그나마 적은 편이었다. 애초에 집순이 체질인 것도 한 몫 했고. 더구나 출산이라는 경험 자체는 내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자아를 해체하기에 충분한 충격이었던 것 같다. 나는 아이가 성장하는 것과 동시에 전혀 다른 존재로 재구성되어간다. 그야말로 아이만큼의 세포 덩어리가 내 안에서 빠져나가고, 빈 껍데기 안에서 내 뼈와 근육과 피를 재생산하는 동시에 정신과 뇌의 구조까지 재조립을 거치는 거다.
100일 가량의 나날들 동안 나는 삐그덕거리는 공장처럼 돌아갔다. 아이에게 제공되는 모든 물품의 사이즈, 수량, 브랜드, 가치를 판단해 구입하고 정리하는 작업. 그 물품을 보관하고 매일 관리하는 작업. 모든 물품들이 실제로 효용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작업. 아이의 발달 과정에 맞는 지침을 세우고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 아이의 다음 발달 과정을 어느 시기 쯤으로 예상하고 계획을 변경해야 하는지 전망하는 작업. 끝없는 컨베이어벨트는 심지어 언제나 아기라는 극한의 민감한 센서를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결국 나라는 인간이 만능이 아닌 이상, 운영자로서 선택의 순간이 온다. 극한의 센서에 맞춰 나도 같이 한도를 올릴 것인지, 혹은 신경을 좀 더 무디게 만들 것인지.
다른 엄마들이 어떻게 해나가는지 너무 잘 보이는 세상에선 원래도 무신경한 나조차 무심함을 유지하기 힘들 때도 있었지만, 나는 결국 내 한계를 너무 잘 알아서, 아이에게 가장 먼저 내 운명론을 물려줘버리기로 했다. 네가 내 아이로 태어난 이상 너는 나에게 맞춰야 한다고. 그게 부모운이라는 거라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것이 공장이 터지지 않고 돌아갈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 반대도 적용됐다. 아기운이라는 것. 순한 아이들은 유니콘이라고 불리는 확률 속에서 내 아이는 내가 내 엄마에게서 들었던 어린시절에 비하면 로또 당첨이 맞는 것 같았다. 다만 내가 기초 체력이 남들보다 더 턱없이 부족해서 그걸 상쇄하는 바람에 공장은 평균 수치로 돌아가는 것 같았고. 사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나는 ‘피땀’까지 흘리는 노력은 하고 싶지 않았던 게 맞다. 나에겐 내 골수까지 빼서 아이에게 바치고는 ‘너는 내 모든 것이니 어서 자라 나에게 배로 갚으라’며 형형한 눈을 빛내는 부모가 되는 꿈은 없다. 아이가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아이는 아이고, 나는 나일뿐. 자아가 아무리 해체되고 엄마로 재탄생한들, 그런 근본은 바뀌지 않는 것 같다. 물론 골수까지 빼줘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부모들도 존재한다. 나에겐 너무 먼 이야기라 이론서도 아니고 소설에 가깝다.
그래서 결론은 그냥 백일 잔치를 하지 않았단 거다. 남아 있는 건 아이는 먹지 못할 초콜릿 케이크 앞에 아이를 멀뚱멀뚱 앉혀놓고 부부가 짤막한 합창을 하고 콧바람으로 흥흥 초 불어 꺼보라며 아이에게 실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영상과 사진 두어 장이 전부다. 그것도 사진 밖 부부는 아마 잠옷이나 걸치고 있을테고. 어차피 아이가 나중에 크더라도 아쉬워하지 않을 거란 건 그저 내 경험에 비추어 봐서 아는 것 뿐이지만. 누구나 만족하는 한계치는 다른 법이지만, 나와 남편의 핏줄이라면 어련히 금반지나 금팔찌의 행방을 궁금해할지언정 때때옷을 껴입히고 사진 수십장을 찍지 않았다고 토라지진 않을 거라는 확신일까. 자기 몸을 죄는 건 무조건 악을 쓰고 거부해서 아기띠조차 두르지 못하는 내 아이는 정녕 내 아이가 맞구나 싶은 마당에 더 말해 뭐할까. 그저 그런 부분은, 그나마 실험을 통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부분들이란 게, 신기하면서도 편안하다. 유전자 놀음이란 정말 무섭도록 정교하고 신비하다.
참, 100일의 기적이란 것도 실은 그런 사례가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편이 마음이 편하다. 우리는 언제나 숫자에 속아넘어간다. 스무살이 되면 뿅하고 어른이 될 것을 믿는 것처럼. 100이라는 숫자가 주는 나름의 감개무량함 정도가 안전한 기대치다. 아기들에겐 아기들만의 시간표가 따로 있다. 결국 내 아이의 시간표, 주기, 특성, 반응속도 등 자질구레한 그 모든 것들을 속속들이 파악해내는 작업이 이 연구의 궁극적 목표니까. 그러니까 아직은 아이가 통잠을 자줄 생각이 없어서 엄마는 이렇게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