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木
나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어라이벌(Arrival, 2017)’을 무척 좋아한다. 국내에서는 ‘컨택트’라는 이름으로 개봉했지만, 내 기억에 이 제목을 한 또 다른 영화(Contact, 1997,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도 내가 좋아했지만 굳이 같은 이름을 쓰진 않아도 됐을 것 같다. 사실 어쩌면 두 영화 모두 외계인과의 만남, 시간의 왜곡 같은 설정 상에서는 비슷한 SF적 요소를 갖춘데다, 시종일관 진지한 분위기, 더 나아가 개인의 한 생애를 꿰뚫는 극적이고 장엄하기까지 한 어떤 순간을 정점으로 연출한 측면에서는 닮은 점이 많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내가 ‘어라이벌’을 조금 더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면, (물론 막스 리히터의 음악도 비중이 크겠지만) 그 영화의 진짜 핵심은 ‘언어’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더불어 그 언어에서 기인한 ‘운명론’ 또한 나를 사로잡았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원작 작가인 테드 창의 소설도 모두 좋아하지만, 원작 소설보다 운명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선택을 한층 더 강조하는 영화의 주제는 내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그것이 ‘아이를 만나기 위해서’라는 선택은 엄마가 되고서 더 절절히 실감하게 된 진실이었다. 실제로 ‘어라이벌’이라는 단어에는 애초에 갓 태어난 아기의 소식을 알린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결국 아이를 만나는 건 역시 외계인을 만나는 것과 동급의 사건인 것이다. 더구나 내 아이를 어르고 달래며 보내는 시간은, 아무리 머릿속이 텅 비어가도록 피곤해도, 때때로 그 외계인들과 단어 하나하나, 손짓과 발짓과 표정으로 소통하려던 영화 속 주인공의 모습을 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비록 내 아이가 영화 속 헵타포드보단 귀엽고 사랑스럽고 예쁘지만, 내가 그 앞에서 하는 행동은 주인공을 똑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내 아이는 영화 속 헵타포드만큼의 지혜를 얻으려면 아직 많은 세월을 필요로 하고 말이다.
아이가 초점을 맞추고, 나를 알아보게 되고, 몸을 어느 정도 제 뜻대로 가누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관찰자에서 관찰 대상의 역할도 맡게 되었다. 아이는 이것저것 새로운 것들을 신기해하지만, 가장 흥미로워하는 것은 결국 제 엄마의 행동과 음성이다. 내가 아이를 세심히 보살피는 만큼, 아이 역시 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끊임없이 제 작은 머릿속에 무언가를 전송한다. 내가 먹는 것, 입는 것, 휘적휘적 걷는 것,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것까지 아무런 필터 없이 모두 그대로 아이의 머릿속으로 흡수된다. 내가 아이를 바라보며 종일 미친 것처럼 혼잣말을 지껄이더라도, 실은 그것조차 모조리 아이는 삼켜버린다. 그리고 어느 날, 아이는 저도 입을 열어 소리를 조율해본다.
“어마, 아에?”
내가 그 말을 듣고 자신에게 우유를 가져다 줬을 때 아이의 기뻐하던 표정이 어찌나 생생한지. 아이는 털을 잔뜩 부풀린 채 의기양양해하는 작은 곰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우리는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발화 언어’ 외의 각종 다른 언어로. 아이가 도리질을 하며 머리를 어딘가 부비면 그건 싫다는 게 아니라 졸립다는 뜻이었고, 기분이 좋을 땐 노래를 하듯 흥얼거려서 알 수 있었다. 음악을 들려줘도 제가 좋아하는 게 나오면 가만히 들었고, 듣기 싫은 건 제가 항의하듯 소리를 질렀다. 신나거나 기대가 되는 게 있으면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몸을 들썩거렸고, 짜증이 나면 제 머리를 쥐어 뜯기도 했고, 무섭거나 알 수 없는 게 있으면 미간을 찌푸리고 이불이나 인형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눈에 보이는 것들 말고도, 실상 영화 속 주인공이 헵타포드와 유리판 너머로 손을 대고 ‘교감’하는 것처럼, 때론 엄마로서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순간들이 종종 있었다. 그런 비언어적인 순간들엔 결국 내가 아이의 통역사가 되고, 아이의 아빠나 다른 가족들은 거기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건 무거운 책임인 동시에 벅찬 독점의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울음도 옹알이도 아닌, 아이가 형태를 갖춘 언어를 사용하려 시도할 때에도, 엄마는 여전히 유일한 통역사와 대사의 자리를 유지한다.
물론 유일하다는 것이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의 동의어는 아니다. 오히려 하나뿐이어서 아이로서는 답답하기 그지 없을 수도 있다. 아이는 엄마가 하는 대로 소리를 내는 것인데, 엄마 귀에는 그 소리가 똑같이 들리지 않는다. 때론 ‘아우’이고 가끔은 ‘오에’이고 간혹은 ‘아야!’이다. 아이는 몇 번이고 반복해야 겨우 엄마가 하나를 알아듣게 할 수 있다. 물론 그 단어 하나로 시행착오를 몇 번이고 겪으면 둔한 엄마라도 아이의 소리와 몸짓, 표정, 시간대, 환경 등의 다른 요소들을 연관지어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는 날도 오지만, 그럼에도 일이 쉬워지진 않는다. 아이는 거기에 다른 의미도 얹을 수 있는지, 응용해보려 하기 때문이다. ‘이게 우유를 가져다준다면, 쪽쪽이도 똑같이 요구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 물론 그 또한 여러 차례의 실패와 오해를 거치고 나면, 엄마인 내가 아이에게 좀 더 발음하기 쉬운 ‘쮸쮸’를 가르치기 위해 애쓰는 장면이 연출되지만.
영화에선 주인공이 헵타포드들에게서 새로운 언어를 ‘선물’받고 미래를 보는 능력을 얻는다. 헵타포드들은 먼 미래에 인류가 그들을 돕기 때문에 지금 그들의 ‘비선형적 언어’라는 무기를 주는 것이라 말한다. 나는 아이에게서 새로운 언어를 선물받는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내가 쓰는 언어를 다시금 아이의 시각에서 재해석하게끔 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새로운 언어를 선물받는 것만큼이나 낯선 감각이다. 내 주변에 내가 이름을 알고 있는 사물들은 얼마나 많은지, 그걸 왜, 어떤 방식으로 알게 되었는지. 그 이름은 또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어떤 행동을 어떤 단어로 설명해야 할지. 왜 그런 소리가 나는 단어를 붙였는지. 모양과 형태를 따른 것인지, 혹은 소리와 성질을 따른 것인지. 아이에게 당장 몸의 각 부분을 가리키며 이름을 말해주려해도 거기에도 단순한 눈, 코, 입을 지나 주름과 관자놀이, 오금, 속눈썹 같은 더 세부적인 단어들까지 머릿속에선 따라붙는다.
나는 언제나 아이에게 지금 얼만큼, 어디까지만 알려주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이 끝없는 깊이의 정보들을 아이에게 모두 입력하기 위한 시간을 가늠하며 아득해진다.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헵타포드들이 인류에게서 도움을 얻기까지는 3000년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지만, 내 아이는 내게서 얻은 것들로 나날이 성장해 고작 2,30년 후면 나보다 더 많은 새로운 지식과 문화와 언어를 접하고 다시 나에게 자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나는 언제고, 아이의 바로 그 뿌듯하고 자신만만한 얼굴을 다시 보기 위해, 지금은 아이의 찌푸린 미간을 손으로 살살 펴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요건 앙앙 물어도 되지만, 저건 에이 지지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