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金
다짐을 한 게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나 된 것처럼, 두 달 가까이 지독한 감기에 시달리고 있다. 새로 시작하기 전에, 지난 시간동안 뱉은 말의 대가도 치를 겸, 몸에 쌓인 먼지며 쓰레기들을 치우고 정화시킬 겸, 한 번은 아파줘야 된다는 듯이.
그러다 문득, 파란 하늘과 서늘한 바람에 눈부시고 달콤한 햇볕의 가을을 맞았다.
종이와 펜촉이 스칠 때의 묘한 쾌감을 잊은 채지만, 걸어다니는 나는 나도 모르는 새 다시 머릿속에서 뭔가를, 그닥 의미는 없고 예전만큼 반짝거리지도 않는 희미한 글귀들을 풀어내고 있었다. 눈에 사로잡히는 이미지들이 신선해서, 갓 잡은 그것들을 단어 한 점, 한 점으로 쳐내는 건 쉽고도 즐거운 일. 다만 역시 그렇게 잡은 것들은 오래 보관할 수 없어서, 내 걸음이 멈추고, 눈에는 너무 익숙해져서 모두 뭐라도 씌운 듯 둔하고 뭉툭해 보이는 것들만 들어오면, 허망할 정도로 만찬 이후에 남은 것이 없다.
그 싱싱했던 것들, 별로 대단치는 않지만 그래도 예쁜 구석이 있는 그것들을 남기려면, 나는 멈춰서, 앉아서, 다시금 머릿속으로 같은 길을, 같은 걸음으로 걸어보는 수밖에 없다. 다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걸음을 옮길 때 내 몸으로 차오르는 에너지, 풍경과 온도와 감각에 의해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색이 변하는 내 기분. 그것들을 그저 가만히 앉아 상상만으로 재현해낸다는 게 실은 얼마나 까다로운 일인지.
거기에 유전, 온천수처럼 아무 제약도 없이 솟아오르는 것들. 그렇게 높이 솟구치는 순간엔 더할나위 없이 즐겁고 생생하지만, 집으로, 정적으로 돌아와서 보면, 온통 젖은 바닥의 흔적뿐. 문득 그걸 종이에 옮길라치면, 살인 사건의 현장에서 핏자국으로 일의 순서를 꿰맞춰나가듯, 그 자국들만으로 유추해보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까, 작가는 본래부터, 범인이자 탐정. 자신의 머리와 마음이 멋대로 뿌려놓은 생각의 궤적을 스스로 추적해가는 아주 기묘한 생물.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스스로도 언제나 회의적이면서, 별 의식 없이 내 삶을 이야기화해서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면, 어쩐지 몹시 서글퍼진다. 아직도 바보 같이 포기 못한 건가.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 없이, 죽을 때까지 나는 이야기를 끄적거리고 싶어하겠구나 해서, 몹시 가련해지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