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조약돌 둘 15화

털복숭이 고양이 마음

화 火

by 하이디 준

그를 할퀴고 나면 막상 내가 더 쓰라리고 아프다. 내가 그와 얼마나 동화되었는지 또 잊고 있다가, 바보처럼 스스로 쓰다듬거나 핥을 수 없는 상처를 만들고서야 기억해낸다.


하지만 단지 좀 더 많은 시간을, 좀 더 가까이 있고 싶었을 뿐이야. 당신이 준 물건, 고른 물건, 좋아하는 물건, 기억하는 물건, 흔적이 남은 물건…

그게 뭐든 결국 물건일 뿐이지.

따뜻하지 않아. 다정하지 않아.


당신과 뭔가를 하는 시간보다, 실은 당신과 무엇도 하지 않는 시간을 더 좋아해. 그냥 당신 옆에서 당신에게 집중하는 그런 시간. 단지 존재하는 시간. 그걸 원하는 만큼 못해서 좀 심통을 부렸어. 어쩌면 매일 기도문처럼 외워야 할지도 모르겠어. 이 베개도, 이 옷도, 신발도, 책도, 장난감도 모두 그가 사준 것. 끝도 없는 목록. 그리고 만족할 줄 모르는 나.


하지만 그래도 달라지지 않아.

시간은 물건이 아냐. 물건은 그 사람이 아니고.

그리고 날 원하지 않는 그 사람은 없느니만 못하고.


결혼해서도 이러면 못 살 것 같다고? 아 그러셔. 난 괜찮아. 거뜬해. 더 나은 사람이 오거나 내가 훌쩍 떠나고 싶어지거나 날 버릴 게 아니라면 아마 난 그냥 죽치고 있을텐데 말이야. 정말 결혼은 해봐야 되니까, 그리고 남자는 다 거기서 거기니까, 그냥 해야 하는 걸까?


신은 왜 인간에게 이런 끔찍한 독초를 심은 걸까. 처음 인간을 만들 때 ‘기대’와 ‘희망’을 넣은 신은 지금 씹어먹어도 시원찮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가 옆에 누워줬으면 좋겠고, 날 안아줬으면 좋겠고. 사랑의 끔찍함과 공포스러움에 대해, 이 모순성의 징그러움에 대해 대체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하지?


얼마나 더 써야 통증이 풀리는 걸까.


기대하고 실망하는 것에 지치면, 기대의 실을 마음에서 뽑아버린다. 그런데 마음도 근육이 있고, 조직이 있고, 살점이 있는 하나의 기관이라서, 뽑은 자리는 끊임없이 통증이 이어진다. 가슴을 문질문질해보고, 따뜻하게도 해보고, 재밌는 것, 웃기는 것을 처방해보기도 하지만, 모두 소용없다.


통증이 사라지는 건 오직, 새롭고 생생한 기대의 실이 같은 자리에 자라나는 순간뿐.


TIME WILL HEAL

TIME WILL HEAL

TIME WILL 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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