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火
이상한 의심병이 도졌다. 유전이라도 된 건가. 아니면 그저 수많은 트라우마들에서 자라난 독소인가.
예전부터 그랬다. 애써 쿨한 척. 남들과 다른 척. 하지만 실상은 멍청한 도도새. 그의 입에 올라오는 모든 여자들의 이름에 민감했다. 순식간에 파르르 분노가 일 정도로. 정신병자마냥. 그리고 겉으론 언제나 나 역시 그들을 너무나 좋아하고 예뻐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 속으로는 그들이 당장 땅 속으로 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또 바랐으면서. 아니, 나는 그런 흔한 여자가 아니야 라며 나까지도 속였다.
그의 친구가 사귀다 헤어졌다는 여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내가 그 여자일수도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울증에 걸린 여자. 폭력적인 가정 문제에 얽힌 여자.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영원한 불행을 믿는 여자. 나는 어쩌면 그녀와 한 끗 차이. 만일 숨길 줄 몰랐다면 나 역시 그를 잃어버렸겠지. 숨길 수 있는, 다른 것을 믿는 척이라도 해보일 수 있는 그 지점이 나와 그녀의 차이를 만들었단 걸 인식하면서도… 내가 늘 서 있는 그 경계의 위태로움이 나를 숨막히게 했다.
너무나, 너무나 끔찍한 고독. 버림받음. 아득하고 까마득한 고통. 유령으로 나를 위로할 수밖에 없는 그 음침한 삶. 절대로,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나는 그가 나를 많이, 넘치도록 사랑한다고 믿어야 한다.
나에게 이런 행복이 가당키나 한가 라는 괴물같은 물음이 떠올라도
그것을 단번에 베어버릴만큼 진정으로 믿어야 한다.
나는 사랑받을 수 있는 자격의 사람이란 걸, 믿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