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조약돌 둘 09화

정신 운동 부족

금 金

by 하이디 준

책의 구절들이 어쩐지 나에게 말을 건네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예전엔 무척 신비로운 기분을 갖곤 했었다. 역시 누군가 날 지켜보고, 돌봐준다는 확신에 차서, 그 동력으로 뭔가를 해내기도 했다.


서른에 벌써 나른하게 지쳐 버린 몸뚱아리는, 이제 그런 경험을 감사히 여기기보다 살짝 성가시게 여기게 돼버렸을지도. 스스로에게 밥 한 끼 챙겨먹이는 것도 일인 나날들엔, 어째 10년 전 같은 성스럽고 은혜로운 빛은 도무지 켜지지 않는다. 애초에 ‘켜진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미지의 생명과 의지를 가진 존재를 상정하기보다, 조작과 거짓, 코웃음이 나올 속임수 정도밖에 상상하지 못한다는 걸 증명하고 있달까.


그렇게도 멍청하고 둔해진 나이지만, 그럼에도 그 누군가는 포기하지 않는 듯하다. 참 지독히도 끈질기다. 바보스러울 정도로 외길이다 싶지만, 뭐 그러니까 인간이 아닌 거겠지. 이런 껍데기 뿐인 나를 아직도 바라보고 있다니. 계속 말을 걸어주려 하고 있다니. 예전엔 울컥했을 일이 지금은 조금 당혹스럽고 안쓰럽다. 내가 그런 감정을 가질 쪽이 아닐 텐데도.


혼자 대화하는 것이 너무 낯설어져 버렸나. 물론 저 말 자체도, 상황도 말도 안되게 이상하지만. ‘혼자’라는 말과 ‘대화’라는 말을 함께 놓는 것부터가.


그보다 나는, 정확히 말하자면, 언제부터인가 정말 스스로를 ‘혼자’라고 절실히 느끼게 된거다. 그 이전의 나는 사실 단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다. 아이의 인형들, 소녀의 환상들.


더 이상 ‘나’를 나눌 수 없게 되면, 나는 글을 쓸 수 없다. 나는 어디로든 자유롭게 파고들고, 다른 이가 되어보고, 다른 생물이 되어보고, 허공으로 흩어져야 하는데. 그럴 수 있어야 하는데. 예전에 내가 가졌던 것들을 낭만이라고 부른 적 없었다. 지금은 그렇게 한 단어만으로 둘둘 싸서 굴려버릴 수 있게 되어버렸다.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인다는 게, 뭔지 모르겠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도리어 그 누군가가 정말 아는 거냐고 물어오니 답할 자신이 없다. 나는 인생을 사는 것, 현실을 느끼는 것과 내 세계를 펼치는 것, 더더욱 광활히 넓혀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 사이의 접점을 모르겠다. 언제나 그 둘은 배척된 관계일 뿐, 한데로 모여질 수 있는 것들 같지가 않다.


현실을 살아내는 것도 실은 잘 모른다. 무엇이 우선이어야 하는지 모호해진다. 그러다보니 그저 제자리. 언제나 한자리에 그대로 우두커니 서서.


유연성을 잃어버렸다.

경계에서 여기 저기를 오가는 도둑고양이가 아니라,

담장 사이에 껴서 구조 요청만 보내는 지저분한 고양이다.

아니, 실은 울기도 관뒀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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