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水
먼저, 나는 수면이 잔잔한 적당한 크기의 호수를 그린다. 바다 정도는 아니다. 나는 아마 깊은 산속에, 인적이 드문 곳에 홀로 반짝이고 싶어하는 물일거다. 어쩌다 길을 잃어 오는 사람을 신기해하는, 그가 갈증을 느낀다면 아주 조금은 마시게 해줄지도 모르는, 좀 차갑고 겁 많은 물.
애초에 내가 목적지가 아니었고, 내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낯선 이는 , 조금은 스산하고 고요한 풍경에 당혹스러울지도. 그는 바로 발길을 돌려 나를 잊어버리는 편을 택할지도 모른다. 사람을 반기는 것 같은 곳이 아니라서.
조금 더 머물기로 선택한 호기심 많은 사람이라면, 생각보다 그 호수가 그렇게 얕지도, 그렇게 맑지도, 그렇게 잔잔하지만도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뭔가 안에 있는 걸까 해서 손으로 물결을 일으켜보거나, 조그만 돌을 던져 파문이 번지는 정도로는, 호수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을 거다. 그가 던진 조약돌은 그저 아래로, 깊이, 가장 어두운 바닥으로 소리없이 내려앉아 자리를 조금 차지하겠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물 속을 차분히 관찰하는 아주 이상한 사람이 간혹 생긴다면, 그는 그 안에 생각보다 다양한 종류의 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걸 깨닫고 또 한 번 당황할지 모른다. 아름다운 것도, 거대한 것도, 떼를 지어다니는 것도,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흉칙하게 생긴 무언가도... 모두 같은 물 안에서 이리저리 유영하고 있다.
그가 만일 그런 것들에 겁을 먹지 않는 조금 대담하고, 조금 무모한 사람이라면, 아마 물 속으로 한 걸음씩 발을 담궈보아도 좋을 것이다. 의외로 호수는 아랫쪽 물이 아주 살짝 더 따뜻하고, 별 저항도 없이 부드럽게 몸을 감싸고 돌 것이다. 그가 물장구를 치며 수영까지 한다면, 그 알 수 없는 호수의 생명체들이 슬금슬금 다가와 그를 구경하기 시작할지도. 함께 헤엄치고 싶어할 수도.
수면 아래의 세계에 흥미를 느낀 그는 점점 더 깊은 곳을 내려가 볼지 모른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바닥이 보이지 않는데, 더 나아갈 수는 없는 지점에 이를 거다. 지독한 수압, 지독한 어둠. 전에 없이 적대적인 생물들. 그곳에서 그는 멈춰야 한다. 그는 수온이 따뜻하고, 아직은 친근한 생명들이 그의 주위를 맴도는 곳까지만 머물러야 한다.
그가 어느 순간, 이제 다시 길을 가야겠다고 정한다면, 호수는 역시 순순히 그를 놓아줄 것이다. 물론 그간 친해진 생물들이 수면 밖으로 머리만 빼꼼 내놓고 그를 배웅 정도는 해주겠지. 그러곤 다시 수면은 아무 일도 없는 듯 잔잔해질 거다.
그가 가끔 이곳에 들리기로 하든, 영영 돌아오지 않든, 그 짧은 배웅은 똑같다. 그의 젖은 옷에서 떨어진 물방울 자국도 금방 마를 것이고, 호수 안의 생물들은 서로를 위안 삼아 그닥 외롭지 않으니까. 그저, 종종 그가 던져놓고 간 작은 조약돌을 굴려보며 놀지도. 아주 조금은, 기다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