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심해를 탐험 중입니다

수 水

by 하이디 준

불과 한 달 전의 글도 여전히 불만에 가득 찬 나인데, 오늘은 내가 얼마나 성인군자급 평안을 얻었는지 기록하려 하고 있다니 역시 부끄러워진다. 올해에 이뤄낸 가장 큰 성과, 성장, 심지어 기적이라고 부를만한 현재의 이 감정, 이 믿음. 이 안정된 상태도 결국 얼마 가지 못할 허상으로, 마법의 가을에 아주 잠시 머물렀던 것으로 끝나버리는 걸까.


그럼에도 가치관과 우선순위에 변동이 일어난 것은 분명하다. 자책하고 다짐하다, 결국 내 진짜 모습은 이거라고 어느 순간부터 인정해버리고, 나를 놓아준 순간. 내가 행복한 것,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들과 사람들이 그 다음. 그 외의 것은 흘러가는 대로 두기. 빈틈이 있는 인간이 되어보기. 남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때론 좀 뻔뻔스럽게 기댈 수도 있는. ‘미안, 실수!’라고 하더라도, 웃는 모습이 밉지 않은 그런 인간이 되어보기. 내가 지향했던 이미지와 상당히 상반되는 새로운 누군가.


최근에 빨간색도 꽤 괜찮은 색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도 그런 마음의 여유의 일환인가 싶다. 물론 겨울이 되어가니 자연스레 찾는 탓도 크겠지만. 내가 세웠던 기준, 가졌던 호불호의 범위가 훨씬 깊고 넓어졌다는 감각이 문득 느껴진다. 사람들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 누구라도 사랑해줄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는 자체가 나에겐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다. 이 부분이야 그의 덕이 클 수 있겠지만.


나이와 성별에 대한 감각도 조금씩 달라진다. 여태 나를 여성으로 분류했을 때 무척 어색하게 느낀다고 말했는데, 생각해보니 여성이나 여자라는 개념을 내가 가능태가 아닌 일종의 부정형으로 생각하고 있어서라는 원인이 새삼 떠올랐다. ‘여자는 –해서는 안 된다’와 같은 형식으로. 왜 굳이 긍정적인 면들을 무시하고 하찮게 만들려는 걸까. 내가 집중하고 있는 부분이 틀렸음을 몸소 체험함으로써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아무리 그런 책이며 경구며 충고를 보고 들어도 머리로만 이해했을 뿐이라면, 이제서야 그것을 감정의 차원으로 느끼고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정말 이기적이 되려면, 정말 강해야 한다는 것.

어쩐지 동화급, 만화급 철학으로 넘어가나 싶고, 정신이 유아적으로 퇴행하나 싶지만.

‘강해질거야!’라고 외치는 낯부끄럽고 간지러운 주인공들의 모습.

하지만, 진실은 의외로 그렇게 단순할 수도 있다. 너무 닳고 닳아서 보이지 않는 걸수도 있다.

유치해보이지만, 유치한 게 실은 제일 좋은 것.

정작 스스로는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냉소하는 것이야말로 치사하고 가소로운 행위.


나는 순하디 순한 고양이가 되어 볼 참이다.

그리고 아주 깊고, 넓게 퍼져가볼 테다.


새로운 심해를 탐험 중입니다...

keyword
이전 04화달과 촛불의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