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火
사람에 실망하고, 부조리함에 좌절하는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말이 뭔지 모르겠다. 애초에 그 상실감과 분노에 말이란 게 닿을 수 있긴 한 건가 싶고. 나는 이미 다 겪었고, 너무 많이 봐서 무뎌진 그것들에 대해, 새로이 아파하는 그에게 나는 위로해줄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 그저 견뎌내야 한다고, 그건 그렇게 생겨먹은 거라고, 당신 스스로를 조금, 그 소용돌이 속에서 의식적으로 떼어내고,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주는 게, 옳은 일일까? 내가 늘 도망쳐 온 것처럼, 그에게도 그저 피하는 게 답이라고 말해버린 건 아닐까. 하지만 나 스스로도 부딪친 적 없고, 정면으로 마주한 적 없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 그에게 당당하기를 바라는 것 또한 위선이려나.
무엇이 현명한 길인지 모르겠다. 어릴 땐 차라리 믿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모든 게 잿빛이어서 옳고 그름을 따지기 어렵다. 아니,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걸어야 할 게 너무 많기 때문이겠지. 소중한 것들에만 집중하라고 조언한다 해도, 당신이 그토록 많은 시간을 보내고 노력을 쏟는 것들에 대해, 아주 데면데면하게만 관계를 유지하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 일인지. 부질없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온통 불합리하다.
그리고 나는 아이의 엄마처럼, 그를 붙잡고 늘어진 채 자신의 불행과 분노를 온통 쏟아낸 그들에게 욕지기가 치민다. 그것은 아주 당연하게도, 그다운 친절이었음에도, 그걸 빌미 삼아 그에게 화풀이를 한 것까지도 지독하게 여겨진다. 물론 그로선, 가엾은 그들에게 그런 악의가 있겠느냐 싶겠지만. 하지만 역시, 대부분의 감정을 삼키는 나로서는, 그들의 유아적인 성토대회가 그저 짜증스럽게만 보이는 거겠지.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잘못된 사람을 찾아가서, 4시간이나 울며 애원했다는 것조차, 나에게는 절박함이나 억울함의 표현이기보다, 어리석음으로 느껴지는 건, 내가 전에도 말했듯 외계인이어서인가.
좀 더 따뜻하고 밝은 위안으로 그를 감싸줘야만 할 것 같은 때에, 나는 더더욱 차갑고 날카로워지기만 하는 것 같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여태까지 나는 그런 식으로 해결해왔으니까. 이젠 그게 해결인지조차 의심스러워도, 바꿀 수 없고 그럴 생각도 없지만. 세상이 잔인하게 굴수록, 나 역시 더 잔혹해지는 건 아닐까.
나와 내 사랑하는 이들이 다치는 꼴을 볼 수 없어서라고 하면, 정당화될까.
용서받을 수 있는 걸까.
용서받아야만 하는 일인걸까, 애초에.
내 마음에, 선택한 이들 몇 외에는 한 치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