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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가 고장이 난 것 같다

by 뇽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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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기계가 아니야."

엄마는 모든 일을

항상 다 하고 싶어 하는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중학교를 다녔을 시절에는

여러 활동보다는 성적만이 중요한 시절이었다.

그때 성적, 풍물 동아리, 학생회, 디카 동호회

모두 참여하던 나를

끝내 단념시키고 몇 개는 포기시킨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때

하루에 쓸 수 있는 용량의

130-150% 공부 계획을 세우고

잠을 줄이면 된다고 말하는 나에게

"너 기계 아니니까 정신 차려."라고 하던 사람이었다.

"다른 집 엄마들은 더 공부하라고 한다던데.

엄마는 왜 그래?" 하며 툴툴거리곤 했는데

사실은 본인을 닮은 나를

가장 잘 알고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어릴 때의 성격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다니는 직장이 규모가 작다 보니

아침부터 퇴근 전까지

쉴 새 없이 바빴다.

일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아침부터 이른 오후까지였는데,

그 시간은 생각이라는 걸 하기 힘들 정도로

정신없이 흘러갔다.

오후에는 처리해야 하는 서류들이

매일 실시간으로 쏟아졌다.

하나를 해결하기 직전에

그다음 일이 찾아왔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내가 일하는 곳은

갖가지 잡다한 일과

여러 사람에게 협조를

구해야 하는 일들이 겹쳐 있다.

사람들과 컴퓨터와 씨름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었다.

일을 하다 보면

시간이 아까워서

화장실을 자꾸 안 가게 되었다.

누군가 자꾸 말을 걸거나

좋은 관계가 아닌 사람이

별것 아닌 걸로 전화를 하면

울컥울컥 화가 치밀었다.

중간에 이슈가 생겨서

통화라도 1시간 하게 되면

그날은 집에 가서 일을 해야 했다.

집에 가서 일을 하게 되면

그 뒤에 하기로 했던 스케줄들이

줄줄이 밀리게 된다.

직장에 앉아만 있어도

해야 될 일이 있는 걸 알아 초조했다.

길을 걷고 있어도

그다음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고민했다.

문제는 내가 끊임없이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딱히 무엇을 이루고 싶진 않았지만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은 하나씩 다 해봤다.

주식과 관련된 공부도 하고 싶어서

30강의 유료 강의도 수강했다.

일이랑 관련이 있어

영어 회화 공부를

한 6개월 정도 했다.

디자인에도 관심이 있어

아이패드 드로잉이나

일러스트레이터,

로고 제작 수업도 들었다.

글쓰기 관련 수업들도,

스피치 관련 수업도

계속 찾아보고 있었다.

이유가 없었던 것이 없었고,

필요가 없었던 배움이 없었다.

중간에 몸이 아픈 적이

여러 차례 있었는데,

몸이 아픈 것보다

해야 할 일들이 뒤로 밀려서

그것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던 일상 속에서

갑자기 틈이 생겼을 때였다.

어느 날

직장에서의 큰 이벤트를 무사히 끝냈는데

꼬마와 남편이 잠깐 놀러 가서 집이 비었었다.

계획한 시간에서

여분의 시간이 생겼다.

그러면 잠깐 쉬어볼까, 하다가

문득 배가 고팠다.

집에 오는 길에 뭐에 홀린 듯이

떡볶이 1인분, 순대 1인분, 튀김 1인분,

콜라, 과자, 아이스크림을 한가득 샀다.

집에 와서 멍하게 핸드폰 하면서

하나하나 먹기 시작했다.

어? 내가 왜 이러지?

그 생각을 하면서도

결국엔 그 많은 걸 다 먹었다.

그 이후 여러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된 건

내가 어느 순간 갑작스러운 시간이 비게 되면

배가 고프지 않아도

뭘 먹고 있다는 거였다, 생각보다 많이.

내가 왜 이러나 싶었다.

어딘가가 고장 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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