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하고 용기가 없어 도전할 수 없었던
중학교 때의 나는 굉장한 소심쟁이였다. 뭐 지금도 마음은 별반 다르지 않지만, 그때는 진짜 심했다. 학급 안에서 아주 간단한 발표를 할 때도 극한의 긴장으로 온몸이 굳었다. 덜덜덜 떨면서 겨우 말을 하고 들어오곤 했다. 친구들과는 꽤나 잘 지냈지만, 다수의 대중 앞에 서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수행평가에서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발표하는 것은 극구 사양이었다. 내가 준비를 다 하는 한이 있더라도 대중 앞에서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당시 우리 학교에는 꽤 유명한 댄스팀(?)이 있었다. 댄스 동아리도 아니었지만, 매년 축제마다 그 팀은 춤을 췄다. 일단 학교의 배경에 대해 먼저 설명하자면, 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남녀 성비가 좀 특별했다. 분명 공학인 중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남중이 2개나 있는 바람에 내가 다녔던 시대에는 매우 드문 여초 공학 중학교였다. 학급에 총 40명이면 그중의 남자애들은 7-10명 정도인 아주 특수한 상황이었다. 내가 교대를 다녀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비슷한 느낌이 아니었을까? 남자들은 여성스러워졌고, 여자들의 기에 눌려 지냈다. 대 놓고 여고나 여중처럼 보이쉬한 느낌의 멋진 선배가 인기 있는 건 아니었지만, 멋진 남자 선배도 부재했던 건 사실이었다. 이 팀의 인기 비결 중 하나는 바로 그거였다. 여자 5명 정도로 구성되었는데, 남자 아이돌 그룹의 춤을 췄다. 매우 잘 췄다. 게다가 리더 격인 그 그룹의 중심인 친구가 키도 큰 데다가 머리를 짧게 쇼트커트로 하고 다니는 스타일이라 더 멋있게 보였다. 학교 축제 운영진에서도 이 사실을 잘 알아서, 매번 축제의 가장 피날레를 장식하곤 했다. (사실 남녀 공학 중학교의 축제가 얼마나 재미없었겠는가....... 그중 그들의 존재는 독보적이었다) 나 역시 그들의 공연을 넋을 놓고 바라보던 한 명이었다. 정말이지 끝내주게 멋있었다.
그렇게 다른 수많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공연을 흠모하던 어느 날, 중학교 3학년 때 그 친구들의 리더 격인 친구와 같은 반이 되었다. 약간은 떨리는 마음으로 조금씩 친해졌는데, 친해지고 보니 우리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하고 좋은 친구였다. 하지만 뭔가 그 숏컷에서 오는 외모의 차이와 댄스 공연에서의 카리스마는에서 나오는 아우라는 분명히 그 친구를 돋보이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축제가 한 달 정도 남았을 무렵이었을까. 그 친구가 다가오더니 혹시, 이번 축제 때 함께 참여해서 춤을 춰볼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얼마 전 학교 체육시간에 방송댄스 수업을 했었는데, 내 센스가 나쁘지 않아 보였다는 것이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아니, 내가? 내가 그 팀에서 춤을? 하지만 내 의식이 미처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거절을 해버렸다. 내가 인지할 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일단 나는 너무나 소심하고 소심했다. 그리고 정말 하고 싶은 게 아닌 이상, 아니하고 싶은 일이어도 곰곰이 생각해보고 대답하는 순간이 아닌 이상, 나서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전형적인 한국 중학생이었다. 나대는 것에 대해 절대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 친구는 조금 아쉬워했지만 두 번 물어보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그 이후로 그 물음이 내 마음에 걸렸다. 내가 남들 앞에서 댄스를 출 수 있다고는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뭔가 그렇게 아쉽고 아쉬웠다. 미친 척하고 한 번 해볼걸 그랬나 하는 마음이 계속 맴돌았다. 하지만 용기를 낼 수 없었다. 그때 나에게는 그런 용기를 낼 만한 자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중학교 마지막 가을 축제가 시작되었고, 너무나 복잡한 마음으로 그 친구들의 공연을 보았다. 여전히 다들 잘 췄고, 멋있었다. 이제는 같은 반 친구의 공연이니만큼 친구들의 이름을 목청껏 소리 높여 부르며 응원해주었다. 그런데 뭔가 마음 한 구석이 쓸쓸했다. 고작 중학생이었던 나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대중 앞에서 나서는 걸 싫어하는 내가, 왜 이토록 저 무대가 아쉬운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내가 얼마나 아쉬워했던 건지, 얼마나 춤을 추고 싶었던 건지 알게 되었지만. 지금도 다시 돌아가서 그 친구들과 연습을 하고 무대에 섰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아마 생각보다 많은 점이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인생에는 딱 한 번뿐인 무대 기회들이 종종 스쳐 지나간다.
그 이후에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에 입학했다. 이쯤이면 댄스 동아리에 가입했으려나....? 싶었겠지만, 나는 전혀 다른 공연 동아리를 들어가게 된다. 선후배 간의 군기가 매우 힘든 학과였다. 내가 들어가고 싶은 동아리와 내가 들어가야만 하는 동아리는 달랐다. 또한 그때도 아직 내가 춤을 추고 싶어 하는 마음보다 남들 앞에 서기 두려운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나 스스로 댄스 동아리를 들 생각조차 못 했다. 다시 시작된 축제, 내 동아리 공연을 마치고 댄스 동아리의 공연을 보는 것이 가장 즐거웠다. 신나고 에너지가 넘쳤다. 부럽고 재미있어 보였지만, 중학생 때만큼 씁쓸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아마 내가 할 수 없는 분야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춤을 추고자 노력할 정도의 의지도 열정도 용기도 없고, 이젠 그만큼의 관심이 있는 지도 의문이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이 추는 춤을 보면서 즐거워하면 그뿐이었다. 조금 많이 즐겁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나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의 학생이었던 시절은 마지막으로 춤과 접점이 있을 뻔하다가 사라지게 될 예정이었다. 아마 일반적인 예상으로는. 그리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댄스 동아리 한 번 안 해본 내가 지금까지 춤을 열심히 추러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