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열정이넘치던 그곳
내가 처음 댄스 수업을 듣게 된 곳은 바로 백화점 문화센터였다. 당시 나름 가까운 번화가에 백화점이 새로 생겼다. 자주 놀러 가서 물건 사고 밥 먹고 구경 다니다 보니 백화점이 친숙해졌다. 대학생 시절 문화센터를 다닐 생각은 거의 해본 적이 없었는데, 워낙 같은 백화점을 단골 가게 들르듯 자주 드나들다 보니 문화센터 앞도 종종 지나가게 되었다. 웬일로 호기심이 생겼던 어느 날 전단지를 하나 들고 집에 들어왔다. 평일 저녁 시간에 딱히 정해진 일정도 없고, 단순히 취직 관련 준비나 공부 말고 다른 걸 배워보고 싶었다. 흥미로운 수업이 많았다. 요리도 재미있어 보이고 꽃꽂이 수업도 괜찮아 보였다. 그러던 중 운동 코너에서 내 눈길을 확 잡아끈 건 바로 방송댄스 수업이었다. 가격도 학생에게 덜 부담스러웠고, 전문 댄스학원보다는 마음의 부담이 덜 했다. 하지만 바로 같은 칸에 적혀 있던 요가 수업도 관심이 갔다. 유연성이 부족한 것에 대해 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나는 방송댄스와 요가 두 강좌 모두를 체험 신청하였다. (당시 그 백화점에서는 1회 체험 신청권을 따로 판매했었다.)
첫 체험수업은 요가였다. 시작부터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구석에서 젊어 보이는 대학생(그게 바로 나였다)이 약간의 동작도 못 하고 끙끙거리니, 아무리 초보자라고 해도 사람들의 눈길이 안 갈 수가 없었다. 중학교 시절 유연성 측정에서 -15cm (발에 닿기는커녕 15cm나 떨어져 있었다는 소리다.) 였던 화려한 과거를 뽐내듯, 나는 정말 심각하게 부끄러운 모습을 뽐냈다. 선생님이 조금만 눌러주셔도 비명소리가 나는 데, 그 소리를 작게 하고 싶어도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고통의 크기가 아니었다. 첫 번째 수업을 받고 난 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집에 돌아왔다. 물론 그만큼 내 근육들이 심각하게 뭉쳐있었던 게 문제였겠지만, 아무튼 내 마음은 도저히 지속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금도 요가를 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 사람이 대단하게 보인다.
첫 체험 수업의 뼈아픈 경험으로 인해, 나는 방송댄스 수업에 대한 기대감이 많이 낮아져 있었다. 그래도 돈을 주고 1회권을 구입했으니, 일단 뭐가 됐든 1시간 운동이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수업에 갔다. 부끄러운 마음에 맨 뒤에 구석에서 다른 사람들 눈에 띌 새라 조용히 숨듯 참가했다. 댄스 전 스트레칭은 여전히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가볍게 몸을 푸는 위주라 요가보다는 할만했다. 그리고 드디어 본격적인 댄스 수업이 시작되었다. 당시 첫 음악이 정확하진 않지만 당시 유행했던 씨스타나 시크릿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말 신나는 여름 노래였다. 선생님이 알려주시는 동작을 어설프게 따라 하면서 첫 댄스 수업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때부터 정말 무아지경이었다. 내가 봐도 내 몸이 어설픈데, 진짜 말도 안 되게 재미있었다. 아이돌을 워낙 좋아했었고, 아이돌 영상도 많이 봤었기 때문에 몸이 그 흥을 기억했다. 내가 직접 춘 적은 없었어도 내가 자주 봐왔고, 동경했고, 나늘 즐겁게 해 주었던 그 모습들을 내가 비슷하게나마 따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던 모습을 직접 하는 느낌. 처음 듣는 노래가 아니라, 내가 일상에서 자주 듣고 따라 부르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노래를 들으면서 춤을 추는 것. 아마 인류가 집단으로 모여 살기 시작한 이래 가장 태초부터 이어져 온 문화이자 예술이 되는 신체 활동이 아닐까. 나는 댄스 수업에서 엄청난 엔도르핀을 느꼈다. 단순히 운동을 해서 개운한 것이 아니라, 그 움직임 자체가가 즐거웠다. 어렸을 적에는 내가 잘 추든 못 추든 신나는 기분일 때는 음악을 듣고 나도 모르게 춤을 췄었다. 어쩌면 내가 잊고 있던 어렸을 적의 본능 하나를 다시 찾은 느낌이었다.
그다음은 고민할 것도 없었다. 당장에 정식으로 3개월 수업을 등록했다. 몇 번 들어보니 선생님 바로 근처의 앞자리에서 배우려면 15분은 일찍 가야 했다. 그래서 더 일찍 갔다. 오랜만에 뭔가에 열정이 생기면서 이렇게 즐거운 적이 있었던가. 맨 앞자리에서 못 추면 어떡하지. 눈치가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뭐 직접적으로 나에게 뭐라는 사람은 없었다. 문화센터에서 배운 것은 집에서 바로 복습했다. (공부를 이렇게 했으면 서울대를 갔을까?) 아무래도 사람이 많고, 다들 수준이 제각각이다 보니 일단은 대체적으로 아주 어렵지 않은 안무들이었다. 수업 진도도 아주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소수 인원 수업처럼 선생님의 동작을 섬세하게 캐치하기는 어려웠고, 잘 모르는 부분도 일단은 대충 비슷하게 추면서 수업 진도를 따라가야 했다. 나중에 다른 댄스학원들도 다니게 되었지만, 앞서 말한 점들을 제외하고는 문화센터 댄스 선생님들의 실력도 좋은 편이고, 입문으로 시작하기에는 가격적인 면이며 심리적인 면이며 부담이 없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중간중간 시험도 치고 방학도 있고 해서 띄엄띄엄 다니느라 다 합치면 한 1년 정도의 기간을 문화센터 방송댄스 수업을 다녔다. 소심함은 여전해서 다른 외향적인 회원들처럼 선생님께 친근하게 말도 못 걸고 늘 굳은(?) 표정으로 댄스만 열심히 추다가 오곤 했지만, 선생님에게서 느껴지는 열정에 언제나 감탄하곤 했다. 인원도 많고 나이도 제각각이다 보니 선생님의 카리스마가 없으면 정신 없어지기 쉬운데, 늘 에너지 넘치는 모습으로 사람들을 이끌어주시고 가르쳐 주셨다. 그 모습에 직업적으로도 감탄스러웠다. 문화센터에서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배우는데도 수업에서 느껴지는 열정에 참 감사했던 마음이었다.
1년 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방송댄스 수업은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일단, 춤을 춘다는 것의 즐거움을 몸소 직접 느꼈다. 지나다가 노래가 들리면 몰래 내적 댄스를 시도하곤 했다. 친구들과 노래방에서 가서 내가 배운 노래가 나오면 그렇게 신날 수 없었다. 내 취미가 댄스예요.라고 말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일상에서 댄스를 배우는 것의 즐거움을 알아갈 정도는 되었다. 유산소 운동을 1시간 동안 실컷 하고 오다 보니 개운한 느낌도 있고 체력도 조금씩 나아졌다.
그렇게 조금씩 즐거움을 알아갈 무렵, 나는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게 되면서 지역을 이동하게 되었다. 다니던 문화센터는 자연스럽게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직장 생활이라는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