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이 밝았다. 오전 7시30분에 집합하기로 했다. 오전 6시에 눈을 뜬 건 학창시절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오전 7시30분 집합이라니. 헐, 7시30분에도 못일어나는데.
부끄러운 얘기지만 아무리 밤에 일찍자도 아침엔 너무 눈이 안떠져서 첫째인 딸이 혼자 일어나서 씻고 밥먹고(아침으로는 시리얼을 먹는다) 옷까지 입고 나서 머리 묶어 달라고 나를 깨우는 시간이 8시30분이다. 후훗.
둘째도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동시에 내보내는 것이 효율적이라 8시쯤 일어나서 아이들도 깨우고 물도 소지품도 챙겨주고 머리도 묶어주는데, 기상시간이 빠르진 않네요.
시간은 돈이고 여행지에서는 특히 더 돈이기 때문에 다른 분들에게 폐를 끼칠 수 없다. 6시에 일어나서 씻고 화장하고 7시에는 무려 조식까지 먹고 집합시간에 맞춰 나갔다.
둘째 날은 본격적으로 자기소개를 했다. 목적지마다 이동시간이 있어 마이크를 돌려가며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윽.
외향적이어 보이나 I성향이 확실한 나는 이런 시간이 너무 두려운데 이미 이런 경험이 있으신 일행분들은(그리고 이미 수필가로 등단한 분들이 많았다) 유려하게 소개말씀을 하셨다.
뒤쪽에 앉아 있던 나에게도 어느덧 마이크가 다가오고, 뭐라고 소개해야할 지 모르겠고, 나는 등단하지도 않았으며 책을 낸 적도 없으니 어떡해야하나. 별안간 궁금해졌다.
나는 누구인가.
이 모임에 어울리는 '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여행오기 2주전까지 나는 15년간 '언어치료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결혼한 지 올해가 10년이며, 두 아이의 엄마이고, 중학교때부터 '미우라아야코'를 좋아해서 <미우라아야코 탄생100주년...>으로 시작하는 여행공지 뜨자마자 남편과 상의도 하기 전에 이 여행에 참여할 것을 결정해버린... 이 정도가 소갯말의 골격 정도가 되려나. 다른 분들의 소개를 들으며 머리를 마구마구 굴리던 와중에 내 손에는 마이크가 쥐어졌다.
아이고...
테이킷 이지...
내가 다른 분들의 소개말을 다 기억하지 못하듯 다른 분들도 비슷할 것이다. 여기는 누가누가 소개잘하나 하는 오디션장이 아니다... 마음을 잡고 입을 뗐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제가 제일 막내인 것 같습니다. 82년생 김지영보다 한 살 많은 김호정이라고 합니다. 중학교때 부터 미우라아야코를 좋아했는데 이렇게 100주년을 기념하는 여행에 올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어...저는.... 애가 둘 있고요, 근데 남편은 한 명 입니다. (일동 웃음) 사실 이 여행은 저의 결혼 10주년 기념여행이에요. (일동 와~)제 10주년여행에 함께 와주셔서 너무 감사해요.(일동 더 큰 웃음)"
푸훗. 때아닌 입방정으로 선생님들(우리는 서로를 00선생님이라고 불렀다)께 강력크한 인상을 남긴 것 같다. 여행중에 수시로 들은 축하의 말
"10주년 축하해요."
네, 정말 짐승같은 시간과 야만의 시절을 견뎠습니다. 축하받을 만 한거죠.
걔는 걔대로, 나는 나대로.
내 바로 윗 나이가 룸메언니를 제외하면 12살 위인 분이었다. 대부분 50대중반 이후부터 70대이상까지의 분들. 오며가며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나 차를 마시거나 대화를 하게 되면
"너무 부럽다, 나는 이런 세상이 있는 줄 몰랐어. 그냥 뭐 애 키우고 남편 바라보고 살림해야하는 줄 알았지. 젊었을 때 이렇게 다니니 얼마나 좋아."
"에너지가 있는거야. 에너지가 넘치니까 지금 집밖으로 뛰쳐나온거잖아. 잘했어. 이렇게 살았어야하는데 나도.. 부럽다. 근데 뭐 다 때가 있는거지. 라떼는 이런 게 없었으니까."
"자기보면 화양연화다 진짜, 너무 좋아보여. 우리 딸 생각도 나고."
이런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사실 나는 중년 이후의 삶을 살아가시는 분들이 문학, 독서, 수필 이라는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작가와 시대에 대해 배우고 여행까지 다니시는 모습이 너무나 부러웠다. 알고보니 우린 서로를 부러워했다.
나이들어도 고상한 취미야 향유할 수 있지만 해외여행까지 할 수 있는 건강과 돈이 있을까? 건강과 돈이 나를 기다려주고 응원해주고 있을까? 라는 생각에 알 수 없는 미래보단 현재에 기회가 오면 잡아야지! 싶었다.
미래가 날 기다려주지 않을 수도 있고, 문학 기행이 필요한 순간은 바로 지금이니까.
막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하는 아이에게 중고로라도 피아노 한 대를 사주는 것이 선물이지, 나중에 더 크면 그랜드피아노를 사주겠다고 약속한 들, 정말 크고 난 뒤에 그랜드피아노를 사줬다고 한들 아이에게 선물이 될 수 없다.
중고 피아노 포기하면 그랜드 피아노 받을 수 있어, 라고 해봤자 지금은 중고 피아노가 필요한 것이다. 나중에 크루즈타고 다니는 문학기행이 있다고 한들 나에게 필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의 문학기행이었다. 각자의 소설같은 인생속에 같은 인연으로 만났고 문학이라는 고상한 취미는 이 여정을 더욱 풍성하게 했다.
눈길 위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기가막힌 설경을 바라보며 이동하는 중에 선생님 한 분이 시 한편을 낭송해도 되겠냐시며 마이크를 잡으셨다.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제목을 말씀하시자마자
아아~ 하며 탄성이 터져나왔다.
정말 나타샤를 사랑하시는 것 같은 선생님의 굵은 목소리와 흰당나귀가 나올 것만 같은 창밖풍경의 조화가 낭만지수를 최대로 끌어올렸다.
이 시간은 현실입니까.
다른 분이 이어 낭송하셨다.
문정희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
아, 묶이고 싶다.
연가라지만 이 정도면 군가 수준의 에너지인데..
두려운 상황에서도 한계령에 묶여 짧은 축복을 누리겠다는 화자는.... 홋카이도에 묶이고 싶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