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싸이월드에 흔적도 없는 연애

내 연애 말이다

by 김호정

남자친구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나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애는 좀 관(심)종(자)이었던 것 같다. 주인공병, 요즘 말로 하면 연예인 병 같은 게 좀 있었나 싶다. 학생회 활동도 열심이었고, 과 동아리 활동도 열심이었다. 공부 빼고는 다 열심히 하는 애였다. 다 열심히 하면서 관심받기 좋아하는 애. 그런 만큼 나한테도 관심 많았던 애.


그 애 역시 나랑 동갑인 같은 과 윗 학번이었다. 나한테 밥 먹었냐, 수업 몇 시냐를 묻던 선배 중 하나. 재수해서 들어온 여자 애가 나 포함 두 명이었는데, 우리 둘과 개인적으로 있을 때면 존댓말을 했다. 개인적으로 있을 일이 별로 없었지만 이 아늑한 캠퍼스 안은 인구 밀도가 높아 서로서로 자주 마주치는데 얼굴만 알고 이름은 몰라서 그렇게 익숙한데도 4년간 인사 한번 주고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얼굴도 알고 이름도 알아서 매번 마주칠 때마다 인사 이상의 말을 주고 받아야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애처럼.

매점에서 도서관에서 어느 구석에서라도 마주치면 늘

“안녕하세요. 어디가요?”라고 물었다.

“(몰라도 되요)매점이요.”

“나도 가던 길인데 같이 가요.”

“.........(뻥치고 있네)”

“학교 다니면서 뭐 불편한건 없어요?”

“(지금이 불편하다 이 자식아)없어요.”

“우리 학번애들이 동갑인데 반말하잖아요.”

“선배잖아요”

“사람은 다 소중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동갑인데 선배라고 막 반말할 수 없죠.”

“(뻘소리 하고 있네)네. 전 프린트 하고 갈게요.”

“이런 거 과방에 오면 그냥 할 수 있는데.”

“네.”

“뭐 먹을래요?”

“아니요.”

“그냥 먹어요. 내가 사줄게요.”


진짜 불편하고 답답했다. 프린트하려고 매점 컴퓨터앞에서 플로피디스켓과 복사 카드를 들고 줄 서 있는데 옆에 계속 같이 서 있었다. 그 와중에 동기들도 몇 지나가고 선배들도 몇몇 지나갔다. 여기서 뭐하냐는 물음에 나는 "프린트하려고" 라고 대답했지만 걔는 "그냥" 이라고 대답했다. 나와 걔를 번갈아 쳐다보는 선배들의 눈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 좀 꺼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가 프린트를 다 하고 걔가 사놓은 커피 우유를 받아 들고서야 수업들어간다고 꺼져주었다.


학생회 활동을 하던 애라 학생들의 인적정보를 파악하는 게 쉬웠는지 뜬금없이 문자를 보내곤 했다. 수업 몇시에 끝나냐, 집에 바로 갈거냐 등을 물었고 2학년을 마치면 군대에 갈거라고도 말했다. 자기의 남자동기들이 꽤 있었는데 군대 간다고 세 명 빼고 다 휴학을 해버려서 아쉽고 외롭고, 여자친구가 없어서 더 외롭고, 그래도 내가 있어서 앞으로는 덜 외로울 것 같고, 그 와중에 잘 생긴 형민이에 대해 알고 있냐고 물었다.


나는 묻는 말에 성실하게 대답했다. 수업은 5시에 끝난다. 집에 바로 갈거다. 형민 선배가 잘 생긴 분이라고 들었다, 라고.


-잘 생긴 남자 소용없어요. 지은이 찬거 알죠? 지 군대 간다고 차버리면 어쩌라는 거죠? 동기들 4학년되면 복학할텐데 지은이 어떻게 보려고.


뭐라고 답을 보내야 할지 막막했다. 씹자니 그렇고.

-좀 그렇겠네요

-나는 2학년 마치고 군대가니까 새내기들이랑 좀 친해지고 가려고요. 그래야 복학하고 좀 도움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잘 생각하셨네요.

-도와줄 거죠?

-네 그래요


문자질을 제발 끝내고 싶었다. 쓸데없는 얘길 하는데 계속 답을 해줘야 한다는 게 너무 싫었다. 그냥 씹을 수도 있겠지만 2000년대 초반은 아직 위아래가 분명한 시대였고 사실 나는 씹을 용기도 없었다. 이 작은 학교에서 괜히 두드러질 필요 있나 싶기도 했고, 그냥 얌전히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 아이와 사귀게 되었다. 특별한 스파크가 있었다거나 운명적인 끌림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냥 내가 21살이었기 때문이었다. 21살.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에너지가 충만한 나이. 그 뿐이었다. 걔는 나에게 성실하게 잘 해줬고 친절했고 맞춰줬다. 누군가 나에게 그렇게 충성을 다하는 모습이 반갑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했다.

잘 생기기까지 했으면 좋았겠지만 다 가질 수는 없는 거니까. 얼굴형 때문에 별명이 마름모였던 외모의 큰 아쉬움을 빼면, 키도 컸고 매너도 있는 편이었고 뭐 그냥 손잡고 다니기에 쪽팔리지 않았다.

딱 그 정도의 마음이었다.


‘사랑’ 자체에 대한 궁금함이었던 것 같다. 그 때는 사랑이라는게 ‘너’이기 때문에 오는 감정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이 궁금하니까 내가 만들어낸 ‘사랑’이라는 감정을 내가 느끼는 것이 그 때의 연애였던 것 같다. 상대를 사랑하는건 아니지만 어쨌건 상대가 있으니까 사랑이라는 감정을 만들어내고 그 감정에 내가 빠져있는 것.


21살. 에너지도 시간도 넘치는 나이니까 굳이 사랑이 아니라도 흥분할 수 있었고 가끔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하기도 했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것은 추억도 아니고 뭣도 아니었다. 그냥 21살의 에너지 넘치는 시간을 낭비한 것이었다. 하필 걔랑.


그냥 그렇게 나에게 걸려든 그 애와는 겨울 방학 시작할 때 사귀기 시작해서 겨울 방학 끝날 때 쯤 헤어졌다. 석 달이면 충분히 사귄거다. 학교에 소문이 나는 것도 싫었고, 걔의 마름모꼴 얼굴은 끝내 적응이 되지 않았다. 겨울 방학이 끝나고 3월에 나는 2학년이 되었고 그 애는 입대했다.


2년 간 전화가 두 세번 왔었다. 처음에는 차 버린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안 받았지만 나라 지키는 군인에게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나중에 온 전화에는 묻는 말에 성실하게 대답해주고 나라 지켜줘서 고맙다, 니 덕에 발 뻗고 잔다는 등의 농담을 건냈다. 대학 마지막 학기였던 4학년 2학기에 걔가 복학을 한 건지 그냥 한번 학교에 왔던 건지 스치듯 한 번 본 것이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