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싸이월드도 안하던 아이

첫번째 남사친

by 김호정

그세 살이 쪘는지 옷이 잘 안 벗겨진다. 휴대폰은 계속 울리고. 지금이야 발신자 번호 표시가 있어서 못 받는 전화가 있어도 별로 아쉬울 게 없지만 그 땐 발신자 표시가 없어서 부재중 전화마다 그렇게 궁금할 수가 없었다.


머리통에도 살쪘나 왜 이리 안 벗겨져, 하며 드디어 윗옷을 벗고 휴대폰을 들었다.

끊겼다.

바지까지 마저 편하게 입을 옷으로 갈아 입었다. 휴우. 누가 전화한 거지, 궁금하네. 하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바빠? 왜 전화 안받아?”

“옷 갈아입느라고.”

“다 갈아입었어?”

“어. 왜?”

“그냥. 농구해.”

“어디서?”

“동네에서. 용진이랑 성식이도 있어.”

“넌 농구안하고 뭐해.”

“그냥. 힘들어서.”

“그럼 쉬어. 전화 끊고.”

대학 들어가서 제일 먼저 친해진 존재다. 선배라고 해야 하나, 친구라고 해야 하나. 재수생은 이래서 좀 곤란하다. 어쨌든 친구다. 친구로 지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다 인천 방향 지하철을 타는데 이 친구는 서울 방향을 타는 애라서 집에 갈 때 자주 마주치곤 했다.


호탕하게 웃는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고, 하얗고 편안한 외모도 괜찮았다. 그 편안한 외모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막 꽃미남은 아닌데 두고두고 보면 잘 생겨 보이는 얼굴. 편하게 해주고 적당하게 티키타카도 잘 되고. 그렇게 학교로 갈 때, 학교에서 집으로 올 때 자주 마주쳤고 가끔은 지하철에서 만나서 함께 학교에 가기도 하고 그랬다. 밖에서 따로 만난 적은 없지만 오고 가는 길에 캔음료를 사마시거나 같이 벤치에 앉아서 노닥거리다 각자의 시간표대로 움직이곤 했다.


그 때는 스타벅스가 들어오기 전이었거나 아주 초창기라 커피 문화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있어 봤자 로즈버드정도인데 밥값에 버금가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그냥 데미소다나 밀키스 정도를 편의점에서 사마셨다. 좀 출출할 땐 초코우유를 마셨고.


동기들보다 더 빨리 친해지고 더 많은 시간을 공유했던 친구. 친구로서는 참 괜찮은 애인데 남자로는, 21살의 에너지 넘치는 여자로서 웬만하면 다 웰컴할 수 있는 나에게도 남자로서는 아니었던 친구.


“넌 내가 어때?”

“뭔 소리야.”

“내가 어떠냐고.”

“술 마셨냐.”

“술 안 마셔 나.”

“피곤하면 자. 헛소리 하지 말고.”

“용진인 너 별로라던데.”

용진이는 나랑 겨울 방학 동안 사귀었던 애다. 한창 나한테 작업 걸고 있던 10월 이었는데 별로는 무슨.


“그래? 바꿔봐.”

“걜 왜 바꿔? 농구하고 있어. 나 어떠냐고.”

“끊으라고.”

“내가 별로야?”

“당연하지.”

“왜?”

“내일부터 쌩까고 싶냐?”

“아니.”

“그럼 이상한 말 하지 말고 끊어. 너 별로야. 싫어. 됐냐?”

“학교는 같이 갈 수 있어? 1호선에서.”

“지금 끊으면 같이 가줄게.”

“알았어. 안녕”


어쨌든 고백을 받긴 받은 건데 아무 느낌이 없었다. 막 싫었으면 내 감정을 들여다 보기라도 했을 텐데,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아무 느낌이 없었으니까. 아무 느낌이 없는 나에게 너무 당황했다. 심장이 좀 뛰기라도 해야 하는거 아닌가. 그게 예의 아닌가.

용진이 내게 온갖 뻘소리를 해대며 들이댈 때는 좀 짜증나고 별로고 왜 저러나 싶으면서도 못 이기는 척 응대할 수 있었는데 동기보다 친한 재하에게 난 왜 때문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기에 미안했고 신기하기도 했고 다음에 학교 갈 때 만나면 친절하게 대해 줘야 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학교 가는 길에 만난 재하는 밝았다. 여느 때와 같았다. 밝은 표정으로 나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전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재하에게 또 당황했다. 고백을 한 사람도 고백을 받은 사람도, 고백을 했지만 거절당한 사람도 고백을 받았지만 거절한 사람도, 고백하거나 고백받기 전과 같았다. 전 날 저녁의 통화는 꿈이었나. 아무것도 아니었나.


신기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신기하다’는 감정이 끼어든 정도라고나 할까. 만나면 늘 재하의 질문으로 대화가 시작된다. 오전 수업이 있는 날은 목요일 하루뿐이라 기억할 법도 한데 매주 한 결 같이 묻는다.


“오늘은 몇 시에 끝나?”

“5시.”

“오전수업은 몇 시에 끝나는데?”

“11시반”

“나는 12시에 끝나는데, 같이 밥 먹을래?”

“아니.”

“나랑 밥 먹기 싫어?”

“조 발표 때메 같은 조 애들이랑 밥 먹고 준비하기로 했어. 오후엔 늦게 끝나?”

“엄마한테 빨리 가야 되서.”

“그럼 다음에 먹어.”

“초코우유 먹자 그럼.”

“오늘은 니가 사냐?”

“그래.”

“그럼 두 개 먹을래.”

“하나만 먹어. 돈 없어.”

“알았어. 그지야.”


재하는 가난하다. ‘가난하다’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윤택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부모님이 이혼하셨고 어머니와 외할머니랑 같이 산다. 8살 차이나는 누나가 있는데 누나는 결혼을 하고 매형의 일 때문에 필리핀에 산다고 했다. 어머니가 동네 분식점을 하셔서 매일은 아니지만 대부분 수업을 마치면 바로 일 도우러 어머니의 분식점으로 가는 날이 많았다. 바빠서 미니홈피도 안하나.


재하는 가끔 같이 가서 밥 먹고 가라고 했지만 진심은 아닌듯한 모습이었고, 나도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재하의 인간적인 모습, 하지만 주눅들거나 위축되지 않는 모습이 좋고 건강해 보였다. 마음에 들었고. 착했다. 구린 것 까진 아니었지만 좀 옷 입는게 촌스럽긴 했다.


재하랑은 사귀진 않았지만 대학 다니던 시절, 부적응자로 살던 시절, 그나마 말이 통하는 남자사람친구로 있어준 인연이 고마워 꼭 언급하고 싶었다. 재하도 2학년 마치고 입대한 걸로 기억하는데, 방학하자마자 입대했고 내가 졸업하기 전까지 학교에서 본 적이 없다. 중간에 연락이 온 적도 없고.


막상 남자사람친구와 남자친구였던 아이 둘이 다 군대에 가고 나는 2학년이 되어 학교에 갔더니 뭔가 텅 빈 느낌이었다. 덩그러니 나만 학교에 던져진 기분이 낯설고 어색했다. 하지만 나의 적응력은 애니멀 수준. 한 두 주 지나니 낯설고 어색한 것에 적응이 되어 별로 걔네들 생각이 나지 않았다.


21살이란 그런 것 같다. 우정에도 연애에도 감정과 에너지를 쏟고 최선을 다해도 방전이 되지 않는 것. 더 하면 더 했지 덜 할 수 없는 것. 그래도 아쉬울 것이 없기에 쿨하게 다음 스텝으로 내딛을 수 있는 것.













이전 03화2. 싸이월드에 흔적도 없는 연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