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정씨.. 뭐라고 부를까요? 암튼 니가 올려놓은 행사기획안 내가 좀 써도 되나? 복지관이름은 지울게. 숙제가 프로포절 작성인데 너무 막막하더라구....요..
-쓰세요. 복지관 이름같은 거 없을 걸요? 문제될 건 다 지우고 올렸어요. 도움되면 다행이죠.
-이제 너도 반말해
-네?ㅋㅋ
-알았으니까 반말하라구
-아 뭐 전 그냥... 저 편한대로 할게요.
-완전 철벽이구나
-네?
-다 들었어. 너 철벽이라고. 우리 학번한테 인기 많았다며. 근데 사귈만한 애가 있었어? 애들 좀 구리지 않아?
-구린건 니네 학번만이 아니었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인정. 사귄 애 없어?
-알아보면 알 수 있을텐데
-영관인 모른다고 하던데
-친구가 영관이 밖에 없나보죠?ㅋㅋ
-응ㅋㅋㅋㅋㅋㅋ 지금은 만나는 사람 있어?
-아뇨
-너무 빨리 대답하는데? 진짜 같잖아
-진짜 없어요. 선배는 있어요?
-나도 없어
이 이후에 어떻게 대화가 이어졌었는지 잘 기억이 안난다. 일주일 정도 거의 매일 네이트온으로 대화했고 그러는 사이 나도 말을 놓았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의 수업 발표를 위해 내가 싸이클럽에 올려 놓았던 기획안보다 더 괜찮을 것 같은 자료를 따로 보내주었다. 그걸로 수업시간에 발표를 했더니 교수님의 칭찬을 많이 받았고 프로포절 공모전에 내봐도 좋을 거라며 따로 면담도 잡혔다고 했다. 그는 고맙다며 밥을 사고 싶다고 했고,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뭐랄까.
올 것이 왔다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목요일 저녁 강남역 CGV가 있는 건물에서 만나기로 했다(지금도 강남역에 CGV가 있는지 모르겠다. 강남역에 못가보고 안가본지 8년은 된 것 같다. 라떼는, '강남역에서 보자'='뉴욕제과 앞에서 보자'였던 시절이었다). 목요일 아침 출근할 때부터 여러 가지로 신경이 쓰였다.
출근할 때는 적어도 세미정장 수준으로는 입어야 하는데 형민은 대학생이니 너무 차려입은 느낌이 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구리게 보이면 안 되는 옷을 찾기가 힘들었다. 백수라면 그냥 청바지와 티를 입으면 될 텐데 나의 직장은 면바지도 허락이 안 되는 곳이라 약속 때 입을 옷을 따로 챙겨갈까 싶기도 했지만 그냥 검은 슬랙스에 남방 같은 베이지색 브라우스를 입었다. 초가을에 어울리는 느낌으로.
강남역에서 내려 역 밖으로 나갔더니 어스름 짙어오고 있었다. 직장에서 강남역까지는 불과 20분인데 20분 사이에 많이 어두워졌다. 아예 어둡지도 않고 밝지도 않은 것이 나 소개팅 한창 할 때 승률이 높은 조도라고 배웠던 바로 그 수준의 어스름이었다.
조금은 떨려왔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학교에서 영관이랑 있을 때 잠깐 인사한 게 전부였다. 소개팅이면 아예 모르는 사람이니 만남에 대해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만남 후엔 주선자에게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이런 상황은 어떻게 상상을 하고 이 이후엔 형민과의 만남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이런 현실이 좀 웃기기도 했고 좀 답답할 것 같기도 했다.
약속장소로 들어서려고 몸을 틀었을 때, 건물 벽에 등을 기대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한쪽 다리는 무릎을 굽혀 발바닥을 벽에 댄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형민을 발견했다. 흔했던 청춘물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 기다릴 때 주로 하는 그 포즈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가 바로 형민인 것이었다. 나를 확인하고 주머니에서 손을 뺀 뒤 똑바로 서서 웃음이 만연한 얼굴로 나를 보며 인사했다.
“빨리 왔네.”
“더 빨리 왔네?”
“응. 생각보다 빨리 왔어.”
마주보고 있는데 이렇게 마주보고 있어도 되나 하는 느낌.
이 아이를 내 눈에 풀샷으로 담고 있구나 생각하니 좀 벅차기도 했다.
잘 생긴 사람을 보고 있으면 벅차는 구나. 벅차오르는구나.
그런 감정은 그 이후에 누구에게도 느껴보지 못했다.
내 인생에 유일했던 감정.
강남역은 좀 시끄러운 곳이다 보니 내 목소리를 들으려고 그가 내 쪽으로 몸을 더 기울이며 허락없이 줌인하는데, 줌인과 더불어 그의 향수 냄새도 좋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작게 말했다. 비싼 곳인지도 모르고 뽀모도로에서 파스타를 먹었고, 근처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셨다.
식사를 할 땐 평소에 좋아하는 음식이나 강남역과의 인연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커피를 마실 때는 그가 미국에 있을 때 갔던 시애틀의 스타벅스 1호점이 엄청 작아서 놀랐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미국에서의 에피소드와 27살에 아직 대학을 다니는 자신의 심경을 이야기했다. 나누는 이야기는 재미있었고 정말이지 시간가는 줄 몰랐다.
음식을 먹다가 혹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눈이 좀 깊게 마주치면 형민은 내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여 풋 하고 웃었고, 내가 왜 웃냐고 물으면 그저 ‘웃겨서’ 라고 대답했다. 사실 여자의 직감으로 그가 왜 웃는지 알 것 같긴 했는데 아는 척 하면 안 되는 건 27살 여자의 센스. 무표정일 때도 잘 생겼는데 웃으니 더 잘 생겼다. 그런데 재미있고 즐겁기까지.
무심한 듯 툭 던지는 말이 너무 재밌고 또 신기했다. 이 잘 생긴 애를 내 앞에 붙들어 놓으려고 나는 이 아이와의 시간이 즐거웠다고, 이 아이의 말이 재미있다고 착각하는 걸까. 뭔가 판타지 속에 머물렀던 시간이었다. 시간은 벌써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