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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정 Sep 07. 2020

4월은 잔인한 게 컨셉인가

어쩌다 들어본 시인의 시구 하나 때문에

4월은 여러모로 잔인했다. 내 인생에서도.

많은 이별이 4월이었고, 2016년 배가 바다로 침몰되어가는 모습을 본 것도 4월, 미세먼지나 황사로 인한 피해가 많은 것도 4월이었다.

봄.

새로운 시작, 혹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4월이지만 그만큼 감기에 걸리기도 마음이 아프기도 쉬운 4월.


 4월은 좀 힘들게 시작했었다.

전에 살던 아파트 같은 층에 사시던 할아버지가 3월 초 확진판정을 받으셨고, 한 달이 지난 4월 초 영면하셨다. 단 한번도 내게 반말하신 적이 없고, 엘레베이터도 늘 먼저 타고 내릴 수 있게 배려해 주셨었다. "먼저 가세요", "들어 가세요", "조심하세요"라고, 늘. 우리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셨고. 오며 가며 마주쳤던 그 따뜻한 인상을 기억한다. 그런데 돌아가셨다. 장례는 치를 수 있는지, 치른다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족들도 격리중일테고. 죽음이 모든 끝이 아니라는걸 알아도 죽음은 슬프다.

코로나는 이렇게 아픈 사람을 더 아프게 만들고, 약한 사람들 더 약하게 만들고.
뉴턴은 페스트가 도는 와중에 미적분을 만들었다고 하니,
우리도 코로나가 끝난 이후로도 계속해서 살아가야 할 세상과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면 좋겠는데,
너무 시끄럽네.
내면도 시끄럽고
외면도 시끄럽고


 4월도 나는 2월과 3월에 이어 업무복귀 명령이 없는 채로 지내고 있던 중에, 초등학생이 된 첫째는 두 번의 개학 연기 끝에 입학을 하게 되었지만 그 입학은 우리가 아는 그런 입학이 아니라

이런 입학.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입학.

알리미, 클래스팅, EBS 등 어플 설치 때문에 32기가짜리 3년 된 휴대폰이 꺼억꺼억 대고 있었다. 목숨과 같은 사진을 지우고 어플들을 깔아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하라는 거 시키고, 답하라면 답하고, 하면서 보냈다.


  이때 절감했다. 미디어 세대가 아닌 할머니나 이모님 등 육아 도우미분들이 보육은 대신해주실 수 있어도 교육은 어렵겠구나. 내가 친정 엄마 휴대폰에 알리미와 클래스팅을 깔아드린다고 한들 엄마가 그 알림 들을 이해하고 아이의 학습을 도모할 수 있을까. 출근하면 나도 바쁜데 알림 내용들을 다 해석해서 엄마에게 전화를 하든 톡을 보내든 해서 그날의 분량을 다 해낼 수 있을까.


 오전 두 시간을 온라인 클래스와 함께 보내고 방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 캠핑놀이란다. 4월이 되면서 다소 지친 나는 둘째를 긴급 보육으로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떤 날은 친구들과 키즈 카페를 대관해서 남이 만들어주는 식사를 하며 우리도 쉬고 아이들도 신나게 놀게 해 주었다. 제시하는 인원수에 맞춰야 하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대관료가 비싸서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물론 집에 있는 것이 제일 안전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러기엔 내 정신이 안전하지 않았다.


 

 벚꽃은 우리를 유혹하지만 유혹만 당할 뿐 갈 순 없었다. 많은 지방축제들이 다 취소되었고, 동네에 핀 벚꽃만 바라볼 뿐이었다. 샷 추가한 커피와 함께.

 출산을 하고도 두 달만 쉬고 출근 재개했던 나인데, 애도 안 낳았는데 3달째 발이 묶이다니 생경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언가 집중해야 할 것이 필요했다. 물론 이런 글을 썼을 만큼



 나날이 살림력이 상승하기도 했지만 이것이 나의 충분한 즐거움이 되진 못했다. 그때 스쳐간 '아, 나 글 쓰는 거 좋아하지'라는 생각. 종이에 인쇄될 만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 그래서 신춘문예, 신인문학상, 공모전을 찔러보다가 나날이 낙방을 하고 좀 더 현실적이고 달성 가능한 단기적인 목표를 세우자는 생각으로 독자투고를 받는 월간지에 투고를 했다.



 첫 번째 투고에 채택이 되어 어깨뽕이 심하게 들어갔는데, 그 달 이후로는 채택된 적이 없어서 다른 월간지에도 투고하기 시작했다. 거기서도 두 달 연속으로 채택되었는데 지난달엔 연락이 없었다. 흑. 그래도 글을 쓰고 돈을 받았다는 경험이 나를 고무시켰고, 그 후로도 월간지에서 제시하는 주제에 따라 매달 글을 쓰고 투고하고 있다.

 블로그나 브런치는 삘이 오면 쓰는 것이기에 주제나 분량, 기한에 상관없이 쓰게 되는데 월간지에 투고하기 위해서는 주제에 맞는 글을 쓰기 위해 고민하고 분량을 조절하며(보통 A4한 장 수준) 그 분량 안에서 기승전결이 나타나야 하므로 나름 글 쓰는 연습이 되는 것 같다. 채택이 되면 좋지만 되지 않더라도 나름대로 '완성'된 글을 한 편 가지게 되는 것이니 아마추어 작가에게는 훈련도 되고 격려도 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글 써서 돈을 받든 상품을 받든, 지들 엄마가 새로운 인생을 도모하든 말든 제일 좋은 팔자를 가진 생명체는 이 아이들. "부럽다. 너네처럼 살고 싶다."는 말을 하루에도 열 번씩 했던 것 같다. 굳이 해내야 할 인생의 과제가 없으며 그저 살아만 있으면 되는 아이들.



둘째 어린이집에서 놀잇감 꾸러미를 보내주셨다. 그 안에 센스있는 커피 선물도 있었다. 저런 식상한 문구가 눈물날 듯 감사했던 건 처음이었다. 커피 타서 젓다가 눈물이 날 뻔했다. 그냥 커피도 아니고 달콤한 커피, 건강을 위해 여러 잔 말고 한 잔, 힘내시라고.. 정말 힘내야지. 감사하다. 서로 간의 응원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애가 둘이라 80만원.

우리 네 가족이 편하게 치킨먹으려면 두마리 시켜야 하고, 짜파게티도 다라이 같은 냄비에 4개, 30개짜리 계란 한 판이 열흘을 못 버티고, 우유는 매일 900ml나 1000ml 한 팩씩 먹는 집이라 교육비가 아니라 식비가 걱정되는 집안인데, 정말 감사했습니다.



베란다 있는 집의 로망. 집에 브루스타가 없어서 가스렌지에서 구워다가 날랐다. 정면에서는 앞동 뷰지만 약간 측면으로 보면 산이 보인다. 나름 운치있었다. 지금은 저 옆에 심어놓은 방울토마토가 많이 자라서 이때처럼 식사하기는 조금 부담스럽지만 코로나 시대에 나름 낭만적이었던 이벤트로 기억에 남아 있다.



여러모로 잔인했던 4월이었다.

4월의 한을 풀고 싶어서 진도 여행을 준비했다가 출발 일주일 전에 환불했다. 내가 사는 동네에 확진자가 급격히 증가했고 그러다 보니 어딜 간다는 게 좀 현행범인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나야 집에 있는 입장이었지만 남편은 휴가를 써야 하는데, 비밀로 다녀오기도 그냥 다녀오기도 애매한 입장이었다.


환불하던 날 나는 이런 시(?)를 썼다.


무너진 것은 일상 안 무너지면 진상

환불은 무상 내 가슴은 흉상

이노무 세상 내 얼굴은 개상

여행을 상상 못가면 망상

내 마음은 피상 내 머리는 돌상

내 성적은 중상 바라는 건 허상

내 정신은 정상 아닌것 같아도 정상


 정상인 것도 아닌 것도 같은 내 정신을 부여잡고 엄마 아빠 캠핑에 따라간 것도 4월이었다. 벚꽃이 만발했던 동네에서 출발했는데 도착한 곳은 겨울 패딩 잔뜩 껴입어야 했던 속초.

잊을 수 없는 여행.

하늘인 것도 같고 바다인 것도 같은 수평선을 바라보며 나를 찾지 않는 아이들을 나도 찾지 않고 한참을 넋 놓고 지내다 왔다.


 집에서 카페인의 도움으로 살던 내가 진짜인가

 바다를 바라보며 넋 놓고 있는 내가 진짜인가

둘 다 진짜이지만 둘 중 하나는 가짜인 것 같은 나는, 혼자서도 둘을 데리고 에버랜드뿐 아니라 여행도 갈 수 있구나(물론 말레이+싱가폴 여행을 가긴 했지만 그건 친구들과 함께 였고).

그렇게 나를 찾는 아이들이 아니었구나.

웬만한 부탁이나 명령에 잘 따라주는 애들이었구나.


 내게 전혀 체질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육아였다. 늘 힘들고 짜증났었다. 지금도 비슷하긴 하지만 그래도 닥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일이 아니라 주어지면 넉넉히 해낼 만큼 나에게 육아가 '할 만한 일', '두렵지 않은 일'이 되었구나 싶은 4월이었다. 서로에게 적응을 한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동안엔 출근을 해서 독립된 공간에서 나의 일을 했었고 그 일이 나의 원동력이라 생각했는데, 코로나를 겪으며 그 일 외에 '투고'라는 다른 분출구를 발견했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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