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후 빨래들을 빨래 바구니에 대충 던져 놓으면 깨끗한 옷이 되어 단정하게 개켜진 모습으로 내 방 침대 위에 배달되었다. 항상 그랬다. 엄마는 왜 통장에 돈 모이는 꼴을 못 보냐며 일 년에 두세 번씩 떠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셨지만 나는 꾸준히 여행을 떠났고, 선물 대신 빨래를 가져왔고, 빨래들은 늘 깨끗한 모습으로 나에게 돌아왔다. 인류 최고의 발명품은 세탁기야. 버튼만 누르면 꾀죄죄한 옷들이 멀쩡해져서 돌아오니까.라고 생각하며 세탁기를 찬양했다.
결혼 후 남편과의 여행에서도 딱히 적폐를 인식하지 못했다. 빨래를 안 해놨으면 입었던 옷 한 번 더 입고. 아니, 사실 그런 생각조차 없었던 것 같다. 그냥 시간 날 때 여유 있는 사람이 캐리어 정리를 하고 빨래를 하면 됐었다. 불편하지 않았으니 급할 것도 없었다.
우리가 아이를 낳고,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빨래가 본격적으로 우리의 여행의 메인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무슨 원대한 꿈을 꾸며 아이를 키우지 않았다. 애들은 그냥 자연에서 흙 퍼먹고 구르면서 크는 거라고 생각하며 키웠다.
그런데 그 생각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의 그 당혹감이란.
아이를 키우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가장 크게 알게 된 것은 옷을 하루에 한 번만 갈아입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여행지에서는 더 그렇다. 일단 집을 떠났다는 생각에 아이들은 물론 어른인 나까지도 다소간 흥분상태이니 뛰어다니고 일부러 넘어지고 주저앉아 노는 건 기본이다. 이해한다. 동네에서는 누려보지 못했던 탁 트인 바닷가와 뛰고 굴러도 아프지 않은 모래밭,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와는 비교도 안 될 큰 놀이터 규모에 신이 나서, 내가 생각했던 대로 자연에서 흙 퍼먹고 구르는 일이 눈앞에서 일어난다.
그렇게 자연과 하나 된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이게 정말 내가 원했던 삶이야. 내 아이가 자연 속에서 행복하게 놀고 있구나’
같은 생각이 아니라
‘저 모래들 어쩔 거야. 숙소에 세탁기 있나? 근처에 빨래방 있으려나? 빨리 마르려면 내일 날씨가 좋아야 할 텐데. 건조기도 있으려나? 오늘 옷 또 갈아입히면 내일은 뭐 입혀? 아 짜증 나.’
온갖 자잘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괴롭혔다.
여행의 생명은 사진이라고 믿고 있는 나에게 이런 식으로 계획이 틀어지는 건 정말 짜증 나는 일이다. 아이들과 여행을 다니면 여러 가지 비상사태를 만날 수 있기에 예외의 경우를 생각해서 옷과 속옷, 양말까지 여유 있게 챙겨 왔지만 문제는 그 예외의 경우가 그야말로 예외적으로 찾아온다는 것이다.
어른 둘만의 여행에서는 빨래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의 일이었다면, 아이들과의 여행에서의 빨래는 완전 필수이다. 특히 우리 가족의 경우 일주일 이상씩 여행을 다니기 때문에 빨래는 너무너무 중요한 일이다.
돌아와서도 그렇다. 밤이 깊어지면 세탁기 소리가 주변 집에 폐가 될 것이기에 집에 도착하자마자 빨래 거리를 들고 세탁기로 뛰어간다.
여행지에서도 틈날 때마다 빨래를 하며 지냈지만 집에 오기 전날부터는 혹시나 안 마를까 봐 그냥 두었던 빨래들이 13kg짜리 통돌이 세탁기가 2번씩이나 열(심히) 일을 해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이다. 분명 빨래를 두 번이나 했는데도 빨래 바구니에 빨래가 또 있어서 깜짝 놀랐다. 여행 가기 전에 안 빨고 간 것들이었다. 아 끔찍하다.
빨래가 끝나면 크고 작은 빨래 건조대를 다 동원하고 그래도 자리가 모자라면 옷걸이에 걸어서 말리기도 한다. 세탁기 버튼 한 두 번만 누르면 마법처럼 끝나는 줄 알았던 빨래는, 탈수 후에 모든 빨래들이 엉켜 한 덩이로 뭉쳐진 것들을 떼내어 탁탁 털어 널어야 한다. 다 마르면 옷을 개켜 각자의 옷장에 넣어주는 일까지 해야 여행의 적폐는 청산된다. 그 외에도 여행을 마친 주부로서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남아있으나 그래도 빨래만큼 부담스럽지는 않다. 남편은 쉬고 다음날 하라는데, 여행 후에 빨래를 안 하고 자면 숙제를 안 하고 자는 기분이라 푹 잘 수가 없더라.
사도 사도 항상 없는 게 옷인데, 해도 해도 계속 나오는 게 빨래라니…. 어이가 없다. 어이가 없어서 적폐인가. 여행 후 우리 집 건조대에 널려져 있는 적폐들을 보며 아이들이 뛰고 뒹굴며 놀았던 바다와 모래밭, 도시에 사는 나에게는 낯설었지만 평화로웠던 수평선과 지평선을 떠올린다.
풍경과 표정들은 사진에 많이 담았지만 사진에 담을 수 없는 우리들의 대화와 끊이지 않았던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노랫소리는 추억으로 내 머리와 마음에 담았다.
여행 후 사진과 추억을 안고 현실로 돌아온 나는, 결국 현실로 돌아오고 말았다는 아쉬움도 느끼지만, 나의 현실이 생각보다 괜찮구나 하는 안도감도 느낀다. 이 모든 아름다움을 추억으로 얻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빨래를 여행의 적폐라고 너무 몰아세울 것도 아닌 것 같다. 저렇게 힘없이 축 늘어져 있어서 그렇지, 쨍하게 말라 있을 땐 여행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사진을 더욱 빛나게 해 주었던 옷들이었으니까.
그래도 여행을 사랑하지 빨래까지 사랑하긴 힘들 것 같다. 허나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면 남편을 사랑한 대가로 시댁을 감당하고 살 듯, 여행을 사랑한 대가로 빨래도 감당하며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