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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의 말11: 공적인 것은 안전하지 않은 것

by 이인미



공적인 것(the public)을 생각할 때 일(업무)의 '분야'나 '종류'를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 소위 나랏일을 한다는 이유로 공적인 것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덮어놓고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다. 공적인 것에 대한 종사 여부는 사람의 ‘태도’와 ‘의도’를 근거로 판단하여야 한다. 판검사, 공무원, 대의원(국회의원&지자체의원)으로서 일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자기자신(가족 포함)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 일하면 그 사람은 공적인 것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으로 위장한 사람이다. 위장의 수준은 사람마다, 사회마다 다를 수 있다. 아렌트의 엄격한 공/사 구분(!)에 따르면 그렇다.


여기서 '사적인 것(the private)'이란, 포괄적으로 말해, 내가 안전하다 느끼는 공간과 관계가 깊다. 사적인 것은 기본적으로 생계의 보전과 신체의 안전을 뜻한다. 사적인 것은 '목숨의 보호 및 연장'에 필수적이다. 사적인 것은 개체의 유지, 종족의 보존이라는 인생의 절박성에 매여있다. 반면 공적인 것은 예측불가능한 타인(들)과 함께하는 것을 뜻한다. 타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안전하게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 사건, 물질 등을 의미한다. 공적인 것은 '인간다운, 정치적인 삶'에 필수적이다.




서울대 법대같이, 이를테면 우리나라 일류대학교를 나와 공직(포괄적 의미)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공적인 것에 종사하는 것? 아니다. 반대로 공직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공적인 것을 내팽개치는 사람들인 것도 아니라고 봐야 한다. 공적인 것을 고려하는 사람은 최소한, 자기자신이 공개적으로 견제, 비판(심지어 비난)당하는 것까지도 ('기꺼이'든 '억지로'든) 수용할 필요가 있다. 아렌트에 따르면, 자기자신의 신체와 심리의 안전만을 추구하지 않는 것, 그게 공적인 것의 개념적 특징이다.


따라서 공적인 것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무속’에 의존할 수가 없다. 왜냐면 공적인 것은 타인들의 검토와 비판과 견제 속에 수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속의 힘을 빌어 내가 원하는 바대로 될 것인지 알아보려 하거나, 내가 원하는 바대로 ‘일’이 되게 하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공적인 것(the public)의 특징이다.


공적인 것은 필연적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공적인 것에는 내가 원하는 방향, 속도대로 진행되지 않을 가능성이 ‘늘’ 매순간 존재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개혁, 문재인 전 대통령의 개혁 또한 공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수시로 견제받고, 비판받았다(어떤 이들은 '발목잡혔다'고 표현하기도 함). 견제와 비판의 주체가 누구였든, 비판의 명분으로 사적 이익을 추구하였든, 견제의 명분으로 비합리적인 의견을 주장했든, 모든 비판하는 자를 물리쳐버리고 밀어버리는 것은 공적인 것의 본령에서 벗어난다.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노 전 대통령은 우리 사회 공적인 것 수준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평가한다. 문 전 대통령도 (요즘 욕을 많이 먹지만) 우리 사회 공적인 것의 수준에서 그 또한 최선을 다했다고 본다. 그분들이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비판과 견제라는 이름으로 반론이 나왔고 또, 반론이 여론을 통해 지지받는 바람에(조중동 등의 영향력이 한몫 함), 그분들의 최선은 좌절되었다. 그분들은 '독재'를 할 수 없었기에, 우리 사회의 공적인 것 수준에서 국정을 운영했기에, 뒤로 물러서기를 여러 차례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사회의 공적 수준이 낮다고 깔보는 것 아니다. 2003~2008년, 2017~2022년의 사회적 사실에 대한 묘사일 뿐이니, 오해 없길 바란다.


그리고 2024년 12.3내란사태를 멈춘 것, 그것은 우리 사회 공적인 것의 수준이었다. 그리고 12.3내란사태가 아직 멈추지 못한 것, 그것 또한 우리 사회의 공적인 것의 수준일 것이다. 이쪽을 보면 희망적이고 저쪽을 보면 절망적인!


말 그대로 우리는 야누스의 달(January) 앞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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