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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의 말12: 전체주의란 무엇인가?

by 이인미

전체주의(totalitarianism)에 대한 오해가 어느 정도 있는 것 같다. 그중 두 가지를 우선 살펴보겠다. 전체주의이론가 아렌트의 이론을 토대로 하여 설명을 시도할 것이다.


1. '한덕수 권한대행 탄핵예고'를 '히틀러의 수권법'에 견줌


12월 24일 국민의힘 원내대표 권성동은 22대 국회 과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야당(들)의 '한덕수 탄핵예고'를 '히틀러의 수권법'에 빗대었다. 권성동은 "방향만 다를 뿐 삼권분립을 붕괴시키고 당 대표가 모든 권력을 휘두른다는 점에서 수권법과 본질이 같다"로 말했다.


그러나 권성동은 전체주의 나치가 강행한 수권법의 본질을 그릇되게 홍보하고 있다. 잘못 운영되고 있는 행정부일지라도 그 행정부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는 것, 그것이 수권법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수권법은, 법을 가지고 무슨 권한을 휘두른 게 아니었다. 본질은 법에 있는 게 아니라, 행정부 권한 증가에 있다. 법은 행정부 권한 '무한 확장'을 승인하는 절차였다.


1933년 히틀러의 수권법은 전권위임법, 전권이양법으로 불리우는데, "입법부의 권한을 행정부로 싹 몰아주는 법"이었다. 나치당이 행정부 요직을 전방위적으로 차지해, 마음대로 모든 국정을 운영하고 싶어, 의회를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난 법이었다. 요컨대 국회출석도 못하고 나치당의 테러를 피해 도망다니는 신세가 된 국회의원들을 체계적으로 배제하기 위한 규정이었다. '입법부의 자살'을 유도하고자 새롭게 발의한, 흉악한 법이었다.


그런데, 12.3내란사태에서 우리나라 국회는 새로운 법을 발의하고 통과시킨 게 아니었다. 행정부의 권한을 입법부가 가져오겠다고 선포한 것도 아니고, 행정부에게 권한포기를 강요한 것도 아니며, 행정부를 없애고자 의도한 것도 아니다. 행정부 수반(윤씨)이 유고된 때에 행정부 수반을 대행하는 자(한덕수)를 향해 제대로 된 행정부 권한을 사용하라, 권고를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미 구비되어있는 법(상설특검 임명 즉시의뢰, 국회 추천 헌법재판관 임명 등)이 활용되었다. 실제로 우리나라 국회는 법률에 의거해 행정부에 대해 압박하는 방법 말고는 다른 해결방안을 갖고 있지 않다. 군/경을 동원할 물리력도 당연히 보유하고 있지 않다.


민주공화국에서 국회는 입법기구로서 스스로 법을 존중하는 기관이다. 그래서 과거에도 히틀러일당이 요상한 법을 들이밀어 국회의 권한을 빼앗았던 것이다. 심지어 그 무도한 히틀러도, 국회를 그냥 대번에 마구잡이로 통제할 수는 없었다. 오직 법 말고는 국회를 어떻게든 통제할 수 없었다. 국회의 존립 근거이자 권한 행사는 오로지 '법'이다.


국회는 "국민으로부터 나온 모든" 권력을 반영할 권한, 견제할 권한, 표현할 권한을 갖고 있는 기관이다. 국회의 권한 즉 표현과 견제는 집행력도 아니고 공권력도 아니다. 물리적 강제력은 하나도 없는 게 국회다.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2. 여론결집과 전체주의를 혼동함


어떤 사안에 대하여 여론이 강력하게 하나로 모이는 현상을 바라보며 성급하게 '전체주의'를 연상하는 사람들이 종종 출몰한다. 예를 들어 2022년 대선에서 이재명 지지자들이 크게 결집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어떤 사람들이 '개딸(개혁의딸들) 전체주의'라는 요상한 조합어를 만들어냈었다(유사 조합어로 '공산 전체주의'가 있음).


12.3내란이 있기 전까지 채상병 특검법, 김건희 특검법 등을 찬성하는 여론이 크게 일어났었다. 여론결집과 전체주의를 혼동하는 사람들은 12.3내란 와중에 내란 특검법, 윤씨 체포 등을 찬성하는 여론이 강력하게 일어나서 (시간이 흐름에도 불구하고) 며칠이 지나도록 계속 그 강력함이 유지되는 현상을 보면서 간단히 '전체주의'라는 말로 퉁치듯 비난하는 태도를 보였다.


전체주의는 표면적으로 여론결집의 모양새를 띤다. 그 결집된 여론에 속해있지 않은 사람에게 불편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자신의 독자적 의견을 갖춘 사람들조차 "어? 다들 저렇게 생각하네?"하면서 스스로의 의견에 의심을 품게 된다. 그런 다음, 그 불편감이 공포심으로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전체주의에 대한 자신의 불편감과 공포심이 현실적으로 자유를 상실할지 모른다는 합리적 의심이라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이 합리적 의심은 곧 현실화된다. 실제로 막강한 공권력이 나타나 사람들에게서 자유를 빼앗아간다.


반면 요상한 조합어 "개딸 전체주의"와 "공산 전체주의"를 퍼뜨리는 사람들의 불편감과 공포심은 자유를 상실할지 모른다는 합리적 의심과는 거리가 멀다. "개딸 전체주의"는 타인의 자유를 빼앗을 공권력을 갖고 있는 실체가 아니다. 백 번 양보해 ("개딸 전체주의"로 호도된) 2022년 이재명 지지자들에게 있었던 것은 기껏해야 자율적 댓글, 불매운동, 공식 선거운동 정도를 활용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들이 공권력으로 타인의 자유를 제압할 수 있었을까? 그럴 공권력은 지지자들에게도 없었고, 그들의 지지를 받는 후보자 이재명에게도 없었다.


여론결집을 전체주의로 무조건 왜곡하고 싶은 사람들은 사실상 자신의 '이익'과 '권능'을 잃을지 모른다는 불편감, 공포심을 느끼며 의심하는 것에서 반발을 시작한다. 현재 상태 이익과 권능을 누리고 있는 집단에 속할수록 그 의심이 강하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의 반발은 여전히 자유롭게 표현가능하다. 따라서 그들 주위에 전체주의의 실체는 없으며, 그들은 전체주의자들에게 자유를 빼앗긴 적이 없다. 그렇다면 그때 그들은 의심을 거두었어야 했다. 자기들의 의심이 합리적 의심이 아님을 깨우쳤어야 했다. 자신들이 자유롭게 입을 열어, 자신과 다른 여론의 결집 현상에 대해 비난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몸소 경험했을 테니 말이다. 민주공화국 구성원인 그들에게도 어차피 주어져있는 '표현의 자유'는 아무런 공권력으로부터도 제압당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의심이라고 다 같은 의심이 아니듯, 겉으로 비슷해 보인다고 해서 여론결집된 모습이 다 전체주의인 것도 아니다. 흔히 숫자가 많으면 전체주의, 숫자가 적은 쪽은 전체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건 매우 단순한 계산일 뿐, 사실과 다르다. 그 정도로 숫자가 많아져 집단을 이루기까지 그 집단 안에서 어떠한 '행위들'이 나타나고 있는가를 주의깊게 들여다보아야 한다(추후 다른 글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계획). 겉으로 보이는 게 비슷하다고 해서 '전체주의와 여론결집은 똑같은 것'이라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된장은 대변(poop)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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